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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12), 박정대 시인

「불란서 고아의 지도」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1/03/23 [21:09]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12), 박정대 시인

「불란서 고아의 지도」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1/03/23 [21:09]

 

 ▲ 몽마르트르 언덕.                                                                         © 포스트24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12), 박정대 시인
                                                  「불란서 고아의 지도」


박정대의 시를 설명하는 몇몇 핵심 주제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아의식’이다. 그의 시는 불란서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소재로 취택하고 있다. 자본이 자본을 향해 미친 듯이 총질하는 실체 없는 한반도(「카이에 뒤 시네마 뒷골목의 시」)를 떠나 불란서를 배회하는 길은 그만의 목적의식과 구체적인 예술적 방안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은 삶의 무게와 시적 상상력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원과 무한의 예술혼을 찾고자 하는 어둠의 시간이자, 자기 정립이다.


『불란서 고아의 지도』(2019, 현대문학)에서, 박정대의 시는 유럽에서 식민지인처럼 둥둥 떠다니는 어둠에 비유된다. 「그래피티」, 「불란서 고아의 지도」, 「누에보다리에 불이 켜질 때」, 「누가 혁명적 인간이 되는가」, 「눈, 불란서 고아의 지도」 등의 시들은 배경 부재의 상황을 관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균형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과 동시에 무한의 어둠 속에서 혁명적 인간이 되어 인류에게 빛을 비추고자 하는 특수한 고아의식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불란서 고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불란서 고아의식의 상상력에서는 대부분의 공간이 불란서 최초의 카페이거나 살롱, 뒷골목으로 나타난다. 이곳을 예술의 근거지로 삼는 ‘불란서 고아’들은 이국 출신의 화가, 가수, 영화감독, 시인, 혁명가 등이다. 다음은 ‘불란서 고아’들의 하룻저녁 지도에 관한 시다.

 

     파리 리술리외도서관에 앉아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리다 보면 밤이 오고 있을 게요.

 

     어둠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저녁이면 나는 그대와 함께 따스한 불빛이 있는 주점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을 게요

 

     11월의 파리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가끔은 눈발이 날리지만 이곳엔 영혼의 동지들이 있으니 그리 춥지는 않을 게요

 

     지금쯤 카페 로통드에선 모딜리아니가 손가락 구멍이 뚫린 장갑을 끼고 장 콕도의 초상화를 그리고에즈라 파운드는 헤밍웨이를 꾀어내 술을 마시기 위해 클로즈리 데 릴라로 가고 있을 게요

 

     로트렉은 물랭루주로 가기 위해 몽마르트르언덕을 천천히 내려오고 위트릴로는 세탁선과 테르트르광장을 지나 포도밭 쪽에 있는 라팽 아질로 가고 있을 게요
                           (중략)
     오늘 밤은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따라가며 밤새 술을 마셔요

 

     생제르맹데프레성당에 잠든 데카르트가 아직 잠에서 깨기 전

 

     센강의 아침 안개가 아직 한 마리 하얀 새처럼 날아가기 전 


                                          -박정대, 「불란서 고아의 지도」 일부분

 

이 시에서 시간과 공간의 표시는 고아의식을 말하는 중요한 메타포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문체와 어투가 ‘미스터 션샤인’의 햇빛 씨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시」) 햇빛 씨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낮과 제국이 우리나라의 반대편에 있던 1907년경이다. 시인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다가 파리에 있는 국립 리술리외도서관을 찾는다. 이런 시인의 내면에는 고향 ‘정선’의 발생 배경이 한몫하고 있다. 그 위에 암울한 한반도의 상황이 착종되어 있다. ‘정선’은 5~6세기 중국 숙신과 읍루에서부터, 벚꽃과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바람과 물길을 따라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다. (「정선」) 시인 자신도 이들의 후손이기에 소외되고 고립된 고아다. 더욱이 우리나라 국토가 분단돼 있고, 민중들은 슬프며, 주권은 어둠에 놓여 있어서, 고아의식에 젖은 시인은 “국가 이기주의를 타파”(「태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해야 한다고 외친다. 심리적 균형 회복을 위해 그는 ‘정선’을 대치할 수 있는 리술리외도서관에서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 불빛과 희망을 찾으러 가는 시에는 몇 겹의 ‘불란서 고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예컨대 ‘나’와 ‘그대’가 주점으로 ‘망명’하기, ‘모딜리아니’의 장 콕도 초상화 그리기, ‘에즈라 파운드’와 ‘헤밍웨이’의 클로즈리 데 릴라 행, ‘로트렉’의 몽마르트르언덕 걷기, ‘위트릴로’의 라팽아질로 가기, ‘레닌’의 카페 르 돔에서의 차 한잔하기 등이 있다. 시인은 불란서로 흘러든 ‘불란서 고아’들의 지도에 대해 진술한다. 시인이 자신을 포함해서 이들의 고아 지도만 그리면 됐지, 왜 또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함께 공연하고, 식사와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는 걸까? 여기에는 이들이 사소한 것들을 행하는 것에 있어 “탐욕적인 현실에 반기”를 들 뿐만 아니라, 타인을 보는 삶에 대한 시각이 독자적이라는 것에서 (「불란서 고아의 음악」) 그 이유를 들 수 있다.

 

아울러 ‘불란서 고아’들은 사건이나 사물을 보는 “상황과 인식에 대한 작은 관심의 차이”가 타자들과 다르다. 이 모호한 경계들이 시인에게 세계를 유쾌하게 살아가게 하는 자극제가 되고, “세계의 슬픔을 애도”하게 만든다.(「시라노 드 베라주라크」) 결국 시인이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이들을 무한 동경한다는 것이고, 이들로부터 영감 받는 예술혼을 자기식의 아름답고 강력한 시쓰기에 활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인이 ‘불란서 고아’들의 지도를 그린다고 해서 퓌르스탕베르 광장에 내리던 비와 눈이 안 내린다는 보장이 없고, 그런 연유로 누군가 두고 온 다락방은 또 누군가의 고아의식에 절은 내면을 적시지 않을 리 없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추기 전, 사람들에게서 죽은 이성과 지성이 깨어나기 전까지 말이다.


박정대의 시는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한반도와 인류에게 평화를 찾아주고자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리고 “실체 없는 괴물과 한바탕” 교전을 치른다.(「태양의 기억이 흐려진다」) 하지만 어투와 연 간격 띄우기 (「그래피티」, 「카리아티드」, 「앙토냉 아르토」, 「누가 혁명적인 인가이 되는가」등) 때문에 시적 긴장감과 비장감은 감돌지 않고 느슨하다. 이는 장시에 의거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함이고, 자신의 영혼을 최대한 열어 예술적인 심취를 하기 때문이며 (「불란서 고아의 음악」), 타 시인들과 달리 호들갑을 떨며 섣부른 자기 위로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고아의식의 시를 보면, 시인의 심리가 강박적인 사랑과 그리움으로 전이 투사된다. 그에 비해 시인의 고아의식 시는 어두운 가운데서도 자유롭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등짐 지고 세상을 떠돌다 온 고아로서, 생의 숲길을 걷다가 고독과 맞닥뜨리며 작은 목소리로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에게서 시란 드라미틱한 것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썼다가 천천히 지워가는 과정”이고, 제 안이 만든 고아(어둠)에서 인류를 구하는 불씨를 탐구하는 일이다.

 

박정대 시인 약력: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작업』, 『모든 건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가 있으며, <김달진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날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

 

 

 

 

    

    ▲권영옥 문학평론가

 

 [권영옥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 경북 안동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시론서 『한국현대시와 타자윤리 탐구』, 『구상 시의 타자윤리 연구』.
 □ 시집 『청빛 환상』, 『계란에 그린 삽화』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 전) 상지대, 아주대 외래교수, 현재) 《두레문학》편집인, 문예비평지 『창』편집위원
 □ <두레문학상>수상.

 □ 이메일 : dlagkwn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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