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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에세이> 담쟁이, 그리움을 그린다
이지우
크게 아프질 않아 자주 간적 없는 병원을 막연하게 선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갑자기 복막염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가본 병원에는 흰 유니폼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의 상냥한 말만 있는 곳이 아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마침 긴 겨울 방학 기간이라 할머니 보호자는 내가 되었다. 병실은 6인실이라 여섯 명의 환자가 있었다. 창가 쪽에 어린 초등학생은 수막염 환자였고, 문 입구 20대 여자는 운동선수인데 이름 모를 불치병에 걸려 온몸이 화상 환자처럼 부풀어 올라 커다란 망으로 된 덮개를 덮어 놓고 병명을 몰라 응급 치료만 하는 중환자였다. 다음날 가보니 그녀가 있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병원을 선망하던 나의 환상은 이렇게 쉽게 깨졌다. 할머니 옆에 앉아 창밖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벽에는 잎 떨어진 담쟁이가 앙상한 줄기만 까칠하고 메마른 모습으로 벽에 붙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벽을 바라보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책의 줄거리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 존시는 폐렴으로 삶을 포기한 채 가을이라 나무 스스로가 떨구는 잎을 하나하나 세며 마지막 한 개의 잎까지 떨어지면 본인도 죽는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안 친구는 아래층에 있는 무명 화가 베어먼 씨에게 말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폭풍우가 치는 밤 존시를 위해 비를 흠뻑 맞으며 담쟁이 잎 한 개를 벽에 그려 놓고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존시는 죽을 거라는 나약한 마음을 접고 병세가 완화되어 새 삶을 산다. 자기의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한 생명을 구해주고 처음이자 마지막 걸작을 남긴 베어먼 화가….
책을 통해 알게 된 담쟁이. 한 생명을 살린 덩굴식물 담쟁이에 매료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천년을 함께한 성처럼 변신시키는 타고난 예술가. 담쟁이는 예술가였다. 몇 년 전 가을날 서울을 나가는 길이었다. 차창 밖 방음벽에 여러 색으로 수놓고 있는 담쟁이가 벽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의 손처럼 보였다. 분명히 내 눈에는 담쟁이는 창작 활동에 타고난 화가 같았다. 덩굴 식물로 흡착 뿌리를 벽에 붙여가며 성장하고 빛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담쟁이는 잎과 잎자루를 따로 떨군다는 사실도 나무 공부를 하며 알게 되었다. 즉 두 군데에 떨켜층을 만들어 잎몸과 잎자루를 따로 떨군다는 특이한 점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마지막 잎새’를 쓴 ‘오 헨리’는 담쟁이라는 식물의 성장 원리를 너무나 잘 아는 작가였던 거 같다. 나는 가을이 되면 벽을 화려하게 물들였다가 힘없이 툭툭 떨어지는 담쟁이 잎을 모아 잎을 겹쳐 말아가며 코사지를 만들어도 보고 바닥에 동그랗게 단풍이 들어가는 패턴으로 케익도 만들어 보며 떨어진 잎과 놀며 가을을 보낸다. 잎 새가 떨어지고 긴 잎자루만 붙어 있는 벽, 잎자루마저 떨구면 휑한 벽을 장식하는 줄기는 또 다른 운치를 만들어 겨울의 썰렁한 벽을 채움으로 지켜준다. 흡착 뿌리의 힘만으로 벽에 붙어 있는 줄기를 자세히 보면 청개구리의 발처럼 동그란 흡착 뿌리를 만나게 된다. 청개구리가 벽을 잘 오르는 것도 이 흡착 발 때문이고 담쟁이가 벽에 붙어 있는 것도 이 흡착 뿌리 때문이다. 담쟁이는 가장 자연스런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천재 화가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담쟁이 사랑에 빠진 나. 저녁 무렵 서울서 돌아오는 길에 차창밖에 보이는 담쟁이를 마주하며 쓴 시, ‘담쟁이 벽화’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들 별보다 많은 불빛들 사이로,
개구리 손이 붓 하나 들고 그림을 그린다 길을 그린다
한적한 길이 그리워,
담쟁이 손이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며 벽을 넘듯이 그리움도 벽을 타고 담을 넘는다. 또 다른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내미는 손. 담쟁이.
【이지우 약력】
□ 현대수필: 신인상.2014년 □ 시현실 : 신인상.2016년 □ 저서: 『푸름에 홀릭』생태에세이 출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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