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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의 여인, 송주성 소설 연재

송주성 역사 중편 소설_ 연재5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5/01/26 [10:23]

광릉의 여인, 송주성 소설 연재

송주성 역사 중편 소설_ 연재5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5/01/26 [10:23]

 ▲자귀나무 열매                                                                                        © 포스트24

 

서자인 유자광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허통하고 병조정랑 종5품에 임명했다. 세조는 함길도를 남도와 북도로 행정구역을 나누어 반란 세력을 잠재웠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 데 성공하자 다시 피부병이 극심해져 스물여덟 살의 유자광을 인솔자로 하여 중전, 세자와 함께 온양온천으로 행차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신숙주로 대표되는 훈구파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훈구파의 늙은 권세가를 견제하기 위해 스물일곱의 사림 구성군을 영의정에 동갑내기 남이장군을 병조판서에 발탁하도록 세조를 움직여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세조보다 두 살 많은 한명회, 동갑인 신숙주 등 오십이 넘은 계유정난 공신 훈구파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신 구성군, 남이장군, 유자광의 이십대 중반 사림파의 갈등이 깊은 가운데 세조의 새로운 지지를 받는 사림파의 젊은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젊은 사림파들은 혈기 왕성한 탓인지 남이장군은 구성군이 세조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였고, 유자광은 종5품에 머무른 것이 구성군과 남이장군이 공적부를 잘못 올린 탓이라 여겼다. 그러나 유자광을 일등공신에 추서하였으나 서자 출신이라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탈락했다. 정희왕후는 뜻하지 않은 역습을 당했다. 공신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용한 왕실 종친 구성군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종친들이 구성군에게 모여들어 세자에게 크나큰 위협이 되자 잘못된 인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성군은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이었다. 작은아버지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는데 사촌형이 어린 동생의 왕위를 빼앗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세조의 병이 갑자기 악화되며 궁중에는 새로운 정난의 바람이 불었다. 정회왕후는 다급했다. 세조가 그냥 죽는다면 크나큰 변이 일어날 긴장감이 감돌았다. 중전은 세조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살피다가 하루 전에 온몸에서 시신이 썩듯 진물이 흘러내리는 세조의 죽음을 예감하고 대신들의 접근을 차단한 채 죽기 전에 둘째아들 해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세조를 압박했다.

 -전하, 당장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부인, 내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습니까?

 -전하가 죽기 전에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여야 단종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 우리가 단종을 죽인 죄를 받는 듯합니다. 첫째아들 의경세자가 스물에 죽고 내가 이렇게 피부병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가 천벌받은 탓입니다.

 -전하는 이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혁명을 한 겁니다. 전하가 새 왕을 세우지 않고 눈을 감는다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양대군은 몸도 약하고 이제 열여덟 살입니다. 영의정에 오른 구성군은 스물일곱의 젊은 왕족이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입니다. 구성군은 왕위에 욕심이 없다고 하여도 종친과 대신들이 구성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역모를 꾀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인이 알아서 신중히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절차를 조용히 밟도록 하시오.

 -전하, 모든 것은 나에게 맡기고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정희왕후는 어의를 불러 세조를 보살피도록 하고 한명회를 조용히 불렀다. 만약에 세조가 위중하다는 소문이 새 나간다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어려운 긴박한 상황이었다. 정희왕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해양대군 세자의 장인 한명회뿐이었다. 노련한 한명회는 훈구대신들을 은밀히 모아 세조의 왕위 선위를 의론해 신속히 진행했다. 세조가 선위의 뜻을 밝힌 지 하루 만에 수강궁에서 해양대군이 훈구대신들 앞에서 면복을 갖추어 입고 감쪽같이 즉위식을 치르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남이장군이 병조판서에 오른 지 십삼 일 만에 세조는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며 생기기 시작한 부스럼이 화산이 폭발하듯 악화돼 고름을 뒤집어쓰고 숨을 거뒀다. 한명회의 훈구파들은 열여덟 살의 새 왕 예종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하도록 결정했다. 대신들이 모두 물러난 깊은 밤에 새 대비는 날이 밝도록 눈물을 삼켰다. 그녀의 울음을 들은 궁녀는 없었다. 훈구파들은 무섭게 젊은 사림파를 몰아냈다. 그 첫 번째 대상자는 무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남이장군이었다. 정희대비는 예종이 즉위하는 날 남이장군을 조선의 군사와 국방을 통솔하던 병조판서에서 궁궐의 경비와 순찰 그리고 왕의 행차 경호를 맡는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남이장군은 조정에 불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그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지은 시가 그의 목을 조였다.

 

백두산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은 마르도록 말을 먹이리라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못하면

누가 훗날 나를 대장부라 하겠는가

 

남이장군에게 불만이 많았던 유자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남이장군이라 칭하는 남이가 궁궐 경비를 서며 별동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새로운 별이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며 역모를 일으킬 것이라 고하였다. 구성군과 남이장군을 두려워하던 정희대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체포하여 고문하였지만 남이는 강력히 역모를 부정하였다. 하지만 기혹한 고문으로 남이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자들을 잡아다 저잣거리에서 남이장군과 함께 팔다리와 목에 밧줄을 묶고 소 다섯 마리에 밧줄을 묶어 소를 천천히 다섯 방향으로 끌어당겨 몸통을 여섯으로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해 죽였다. 유자광은 남이가 한명회를 처단하고 새로운 왕을 추대할 것이라고 예종에게 고변해 남이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일등 익대공신에 올랐다. 정희대비는 나라가 어수선해 어린 예종을 모시고 포천 운악사로 행차했다.

 대비가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세조대왕의 능은 어디에 쓰는 것이 좋겠습니까?

 -대비마마, 포천 운악산은 동으로는 금강산, 북으로는 묘향산, 남으로 지리산, 서로는 구월산이 있어 운악산은 천하제일의 명당입니다. 봉선사에서 서쪽으로 오 리를 가면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명당이 있습니다. 세조대왕의 붕어 소식을 듣고 소승이 능침 자리를 잡아놓았습니다. 

 -두 마리의 용이라 하면 또 누가 그곳에 눕는다는 말입니까?

 -대비마마, 백호의 다섯 번째 왕이 누울 자리입니다. 아직 그 능의 주인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세조대왕과 예종 두 명의 왕이 나왔는데 나머지 셋은 누구입니까?

 -대비마마, 운악산 아래 세조대왕의 능을 쓰고 광릉이라 이름하면 소승이 말한 대로 광릉에서 다섯 왕이 나오고 조선은 고려에 버금가는 긴 세월 왕조를 이어갈 것입니다. 또한 미래에 미륵의 빛이 비출 한반도의 터는 포천입니다.

 

정희대비는 세조의 극락왕생과 선왕의 업적을 받든다는 의미로 운악사를 봉선사로 이름하고 의숙공주 부마 정현조와 한명회를 책임자로 지명해 봉선사를 중창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숙주와 한명회는 광릉 사방 구십 리의 민가를 철거하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뽑을 수 없는 왕의 숲으로 조성하고 군사들을 배치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세조는 피부병에 시달린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죽어서라도 빨리 부스럼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시신이 빨리 썩을 수 있도록 무덤에 돌방을 만들지 말고 간소하게 흙으로 덮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여 십이지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예종은 동 이만오천 근을 들여 쌍룡꼭지와 연꽃무늬를 새긴 동종을 만들어 범종각을 세워 달았다. 정희왕후는 봉선사를 광릉의 원찰로 삼은 기념으로 느티나무를 심고 어실각을 세워 세조의 위패를 모시고 하마비를 세워 봉선사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말에서 내려 걸어서 봉선사에 들도록 왕의 위엄을 세웠다. 봉은사와 봉선사 두 절이 조선의 모든 사찰을 관리 감독하도록 하고 왕실에서 보호했다. 정희대비는 세조의 묘호를 세조대왕으로 정하여 아버지 세종대왕보다 높여 불렀다. ‘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게 붙이고 후대 왕들은 ‘종’을 붙였으나 정희대비는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라 우겨 ‘세조대왕’이란 묘호를 붙였다.

 

봉선사에서 돌아오자 왕실의 종친들 불만이 폭발했다. 조선 최초로 예종과 나란히 앉아 수렴청정하는 것도 불만이 많았는데 세조대왕으로 묘호를 칭하고 예종의 원상으로 신숙주, 한명회를 임명해 훈구대신들이 예종을 대신해 조정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종친들이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무예를 갖춘 구성군을 옹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희대비가 구성군을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하였으나 아버지 임영대군의 죽음으로 구성군은 영의정을 사직해 화를 면했다. 정희대비는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산군을 한명회와 훈구대신들의 상소로 잘산군에 봉했다.하지만 정희대비는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십삼 개월 만에 몸이 약해 갑자기 사망하는 큰 슬픔을 다시 한번 맞이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네 살이라 단종을 생각하면 왕으로 세우기 어려웠다. 의경세자 큰아들 월산군이 세조의 총애를 받고 나이가 열여덟로 장성하여 월산군이 왕위 계승 일순위였다. 하지만 정회대비의 생각은 달랐다. 월산군은 왕실 교육을 받아 총명하고 똑똑해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순수한 성품에 술을 즐기고 산수경치를 즐겨 문장에 뛰어났지만 왕희대비는 월성군의 학자풍 성격이 정치와는 맞지 않는다고 봤다. 또한 그의 외척은 강력하지 못해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소지가 많았다. 세조대왕이 왕권을 강화해 신권을 누르려던 정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훈구파들이 다시 원상으로 득세하며 조정의 정책을 쥐락펴락하면서 왕권이 무너지고 신권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정희대비는 세조의 왕권 강화정책을 뼈저리게 느꼈다. 

 

 

 ▲송주성 소설가                                                         © 포스트24



[송주성 소설가 ]

2014년 금샘문학상 대상 작품활동 시작

2018년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2019년 무예소설문학상 최우수상

 

[저서]

2018 장편소설 <직지 대모>

2021 장편소설 <국궁>

2023 장편소설 <후쿠시마 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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