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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에세이> 어미의 심정, 로제트
이지우
탄천을 걷다보니 지난가을에 씨앗을 날린 사그라진 풀들이 푸석한 모습이다. 녹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풀 틈에서 바닥에 바짝 엎드린 붉은 갈색 옷을 입은 로제트를 만났다. ‘로제트’는 ‘방석 식물’이라고도 하고 ‘근생엽’이라고도 한다. 지열의 힘으로 겨울을 이겨낸 야무진 생명체이다.
봄이되면 바구니를 들고 논두렁 밭두렁을 다니며 달맞이꽃, 개망초, 민들레, 등 근생엽 밑동을 잘라 데쳐 나물로 먹기도 하고 된장국을 끓여 먹으며 겨울에 부족한 양기를 보충했다. 풀들은 앞마당, 담장 아래 어디든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자리 잡고 자라기 때문에 굳이 마트에 갈 이유가 없었다. 지천이 마트니까.
그럼 로제트란 무엇인가? 로제트는 Rose(장미)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달맞이꽃의 근생엽을 보면 장미 모습과 근접하다. 겨울을 난 잎을 보면 초록이 아닌 땅 색인 붉은 갈색이다. 붉은 갈색을 띠는 것은 광합성을 피하고 지열을 받아들이기 위해 썬텐을 한 것이다. 겨울을 나기 위한 초본들의 전략이다. 사그라진 풀줄기는 어미의 심정으로 로제트에게 이불이 되어 주고 이런 보호를 받고 로제트는 땅에 바짝 엎드려 겨울을 이겨낸 것이다.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영하의 온도에도 얼어 죽지 않으려는 풀들의 끈질긴 생존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겨울에 사그라진 풀들이 있는 누런 들판을 마구 밟고 지나다닌다. 지난여름 풀이 무성하여 마음 놓고 들어가 보지 못한 곳까지 무심히, 때로는 알면서도 사그라진 풀을 마구 밟고 다닌다. 인간의 정복심리는 이렇게 발동이 되고 그 아래 납작 엎드린 로제트는 사그라진 풀들의 보호를 받으며 최대한 땅에 엎드려 있어 끄떡없이 다시 생존하는 것이다.
땅 기운은 곡선으로 감싸주고 태양의 빛은 직선으로 생명체에게 다가간다. 인간이든 풀이든 태양 광선으로부터 멀어진다면 바로 암흑의 시대가 되겠지만, 이처럼 동‧식물 모두가 빛을 향한 마음은 같은가 보다.
가까이 다가온 봄볕. 멀리 있던 겨울빛과는 다르게 따사롭게 다가와 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덮어줬던 사그라진 줄기는 습기에 녹아 양분이 되었다. 겨울을 이겨낸 로제트는 잎을 활짝 벌린다. 최대한 빛을 많이 받을 준비를 하고 식물의 생장점에 있는 원기를 끌어 올린다. 봄볕에 빠르게 성장하는 풀들은 곧 줄기를 만들고 나무가 곁가지를 만들 듯 분화시키며 꽃피우고 열매를 만들 것이다. 성장이 시작되면 로제트는 본연의 일을 마쳤기 때문에 소중한 아기를 다루듯 성장을 돕던 일은 새롭게 나오는 잎에게 임무 전달을 하고 제일 먼저 시들어 버린다. 로제트(방석식물)의 소중한 임무를 완성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 안전하게 새싹이 자라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봄이라는 자연환경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알맞은 빛과 물, 온도와 바람을 데려온다. 이 환경에 식물은 자신을 맡긴다. 봄·여름에 키를 키우고 꽃을 피워,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날려 또 다른 로제트가 태어나길 소망하며 생태계 순환은 이어지고 그 한자리를 지켜나간다. 수 천 년 전부터 그랬듯이….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하고 고마운 풀들이 없었다면 식탁은 아마도 삭막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식을 낳아 젊음 모두를 받쳐 가르치고 길러 결혼시킨 후 사후 관리까지 들어간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특히 자식을 향한 마음과 손주가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 혹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마지막 인생이 사그라지는 순간까지 자녀를 향한 해바라기 삶을 살고 있다. 이런걸 보면 인간도 한해살이풀이나 두해살이풀들의 생존 전략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소파 위 방석하나가 눈에 띤다. 가끔 들리는 아들을 편안하게 맞이할 방석이다.
【이지우 약력】
□ 현대수필: 신인상.2014년 □ 시현실 : 신인상.2016년 □ 저서: 『푸름에 홀릭』생태에세이 출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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