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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14 -시공간의 ‘동백’
한 상 훈 문학평론가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송찬호, 「동백이 활짝」 전문
첫 구절부터 “사자가 솟구쳐 올라”라는 화자의 진술이 놀랍다. 동백이라는 식물적 소재의 시에서 갑자기 웬 동물의 출현인가. 시를 읽는 독자의 얼굴을 할키듯 튀어오르는 ’사자‘의 생생한 표현에 갑자기 멍멍해진다. 식물적 이미지인 ’동백‘에 동물의 제왕인 ‘사자’를 호출함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동물적 상상력을 동원해 ‘동백’을 소재로 한 시공간에 새로운 세계의 참신함을 만들어 주고 있다.
동물과 식물을 충돌시키면서 낯선 공간을 형성하기에 “꽃을 활짝 피웠다”라는 평범한 언어가 독자들의 마음에 새로운 이미지의 ‘동백’으로 와닿게 되는 것이다. 사자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는 단지 붉은 동백의 아름다움만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는 아닌 듯하다. 2연에서 화자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나타난 동물적 상상력은 시인에게 시를 써야 하는 절박감과 무관하지 않다. 그 절박감은 나태해지려는 시인 자신의 내적 정신세계와 관련을 갖는 것이다. 마지막 행에서, 동백이 지는 모습을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마무리하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특히 ‘베어물고’라는 감각적 표현은 ‘사자’의 동물적 이미지와 결합하여 작품의 미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봄을 기다리다 못해 추위에 피는 꽃 가장 아름다운 순간 떨어지는 꽃 쪽빛 바다 앞에서 그리움을 던지듯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있는 향일암에 동백숲은 쏴아 파도처럼 날리고 울창한 숲 사이 하얀 동백 가슴 노란 동박새의 낭랑한 지저귐 오백년 세월 거목으로 살았어도 뚝 뚝 떨어져 미련없이 지는 꽃 땅에 떨어져서도 만개하는 꽃 -김행숙, 「향일암 동백」 전문
김행숙(1944~)의 이 시는 송찬호(1959~)의 「동백이 활짝」과는 대조적인 작품이다. 송찬호가 시적 상징이나 고도의 함축에 치중한 것에 비해, 김행숙은 향일암의 동백숲을 지리적 거점으로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일상적인 언어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1, 2행에서, 시인은 동백꽃이 지닌 특성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봄을 기다리다 못해” 겨울 추위에 피어난다는 것과 꽃의 절정에서 송이째 떨어진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시는 중심 소재인 ‘동백’에 대한 경이로운 발상이나 시적 긴장감은 약한 편이나,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있는” 향일암의 동백숲이 전달해주는 서정적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작용하기에, 척박한 도시공간에 살아가면서 정서가 메마른 독자들의 무딘 감성을 자극한다. 또한 남도지방이나 제주도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하얀 동백”과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고 사는 작은 새인 “가슴 노란 동박새” 등 구체적이고 참신한 질료들을 시공간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향일암 동백숲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선운사에서」 전문
동백꽃으로 유명한 전북의 ‘선운사’와 “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꽃’이 ‘동백’임을 알 수 있다. ‘이별’을 모티프로 그린 작품이지만, 시적화자가 슬픔에 젖어 울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임을 빨리 잊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적 화자의 어조는 매우 냉랭하다. 이 시는 동백꽃의 피고 지는 모습을 1연에 놓고, 2연에 남녀의 이별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즉 1연은 2연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이러한 병렬적 배치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의 전달이 비교적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세밀히 들여다 보면 1연과 2연은 동일한 의미를 반복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다. 1연의 동백은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란 표현처럼 꽃의 생태적 특성에 맞추어, 지는 것에 비해 피어나기까지의 시간이 만만치 않음을 진술했다면, 2연에선 “그렇게/ 순간”이란 표현처럼, 한눈에 ‘그대’가 내 마음에 들어왔듯이 ‘순간’에 화자의 기억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차이 때문에 독자들은 시를 재차 음미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사랑하는 임에 대한 헤어짐의 슬픔을 피고 지는 ‘꽃’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으나 그 의미의 맥락이 1연에 나타난 ‘꽃’의 비유와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은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화자가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이라는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임을 쉽게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대를 사랑했던 임에 대한 잔영이 여전히 남아 있어, 내 의지대로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안타까움. 그렇다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무작정 헤맬 수도 없고, 상처가 아물 수 있는 방황의 기간이 녹록지 않은 여성의 내적 심리를 이 시는 그려나간 것이다. 요컨대, 최영미(1961~) 시인은 임과의 이별 후에 오는 내면적 고통을 동백꽃의 피고 지는 모습과 대비하면서 쓸쓸하게 노래하고 있다.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문정희, 「동백」 전문
동백은 꽃의 절정에서 힘없이 툭 하고 떨어져 버린다. 마치 목이 부러지듯 통째로 떨어지는 특성이 있다. 꽃이 떨어지기 직전, 가장 아름답게 핀다는 동백꽃. 문정희(1947~)의 「동백」은 이런 동백꽃의 속성을 바탕으로 이별의 상처를 소재로 다루고 있으나, 단호하고 강렬하게 펼쳐진다.
첫 행부터 극단적인 생의 단면을 표현한,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시적화자의 진술은 사랑의 상처로 인한 자살 충동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어서 ‘뜨거운 술’이나 ‘천 길 절벽’ 등의 시적 표현은 생의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을 때, 그 지점이 바로 ‘소멸’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매우 극적 표현이어서 독자의 시선이 집중된다. 더구나 ‘독약’마저 붉다는 표현은 무엇일까. 동백의 붉은 빛 황홀한 아름다움에서 시인은 아마도 죽음의 미학을 매혹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시인은 꽃이 떨어지는 풍경을 통해 생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주된 수사학은 하강 이미지다. 동백이 붉고 아름답게 피는 모습이 아니라 어느 순간 꽃송이 전체가 떨어지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 그렇고,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나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눈부신 소멸” 등의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을 암시하는 하강 이미지의 비유적 표현과 시의 바탕에 관류하고 있는 허무적 정서가 절묘하게 조응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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