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릉의 여인 송주성 소설가
세종이 보낸 감찰상궁이 군시기판관 윤번의 집으로 궁녀들과 함께 은밀히 찾아왔다. 부인이 대문 밖까지 달려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대궐에서 나온 상궁을 안채의 정실로 맞이했다. 상궁은 왕자의 비를 선보러 온 자리로 윤번은 아들 여덟에 딸 둘이 있었다. 안주인이 별당으로 하녀를 보내 큰아씨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열두어 살의 큰딸이 부인 옆에 앉으며 큰절을 올렸다. 상궁은 눈여겨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하며 자세히 얼굴의 생김새를 작은 점 하나까지 살폈다. 성격은 온순하고 착해 보이나 부끄럼이 많고 말수가 적었다. 그때 방문이 바람에 열리듯 슬슬 열리며 어린 딸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 어머니 옆에 앉으며 상궁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안주인이 어서 나가라고 호통을 쳐도 나가지 않고 꿋꿋하게 무릎 위에 두 손을 다소곳이 얹고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세종과 왕비는 둘째아들 수양대군의 비가 될 며느릿감으로 온순하고 미모가 출중하다는 윤번의 딸을 생각하고 상궁을 보내 혼사를 의론토록 하였다. 세종은 조용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맏아들 세자보다 강직한 성격에 무예를 좋아하고 활달한 수양대군의 거친 성격을 누그러트릴 신붓감을 원했다. 상궁이 미소 지으며 안주인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입니까? -우리 집 막내딸입니다. 아직 철이 없어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들어와 송구합니다. 어머니가 어서 가라고 막내딸 치마를 잡아당겨도 모른 척하였다. -부인 아닙니다. 그냥 앉아있도록 하세요. 상궁이 막내딸에게 물었다. -올해 몇 살인고? -상궁마마, 소녀 올해 열 살입니다. -그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들어왔느냐? -네, 언니의 혼사를 논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이해 들어왔는고? -상궁마마, 저도 궁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째서 궁으로 가려고 하느냐? -우리 집에는 이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습니다. 궁에는 좋은 책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독서를 하고 싶어 궁으로 들어가길 원한단 말이냐? -예, 독서로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여인의 교양을 쌓고자 합니다. -그래, 어떤 책을 읽었는고? -천자문을 공부하고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사서를 읽고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오경을 보았습니다. -궁으로 들어가면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가? -주자대전, 성리대전 등 주자학 책을 읽고 보고 싶습니다. 상궁이 놀라는 표정으로 큰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독서를 좋아하느냐? 막내딸이 언니가 대답하기 전에 대답했다. -언니는 자수 놓는 것은 좋아하나 책 읽은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안주인 얼굴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막내딸을 나무랐다. 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상궁은 막내딸을 다시 한번 요리조리 유심히 살피고 일어나며 안주인에게 말했다. -궁에 들어갔다 다시 오겠습니다. 상궁은 조용히 앉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언니를 뒤돌아보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안주인은 막내딸의 등짝을 후려치고 종종걸음으로 상궁을 따라가며 어쩔 줄 모르고 몸을 조아렸다. 막내딸은 어느새 방에서 나와 어머니 옆에서 상궁과 궁녀들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궁 뒤를 따르는 궁녀들이 여러 번 뒤돌아보며 막내딸을 살폈다. 대궐로 돌아온 상궁이 주저 없이 세종과 왕비에게 아뢰었다. -윤번의 딸은 조용하고 온순해 수양대군에게 순종할 여인입니다. -그럼 수양대군에게 어울리는 신붓감이 아닌가? -전하, 윤번에게는 막내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나이가 몇이나 된 아이인가? -열 살이므로 수양대군보다는 한 살이 어린 아이입니다. -그래, 상궁은 어느 처녀가 더 참해 보이고 수양대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전하, 언니는 참하고 순진해 수양대군의 마음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막내딸은 활달하고 당돌한 성격이라 수양대군의 뜻을 거스를지라도 휘어잡을 것입니다. 왕비가 세종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전하, 수양대군도 사냥보다는 독서를 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세자를 잘 보필하지 않겠습니까?
상궁은 윤번의 집으로 다시 찾아가 막내딸과 어명으로 혼담을 마무리하였다. 1428년 세종의 뜻에 따라 수양대군과 혼례를 치른 윤번의 막내딸은 열 살에 낙랑대부인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사냥을 즐겼다. 낙랑대부인이 아무리 독서를 권해도 글에는 뜻이 없었다. 무예와 사냥을 즐기는 수양대군은 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왕건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포천의 운악산 일대 왕실 사냥터에서 주로 사병훈련과 사냥으로 시간을 보냈다. 세종은 성군으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세자는 세종을 보필하여 조선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살기 좋은 나라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낙랑대부인의 호탕한 성격과 눈부신 미모에 빠져 부인을 아끼고 사랑해 둘의 사이가 연리지와 같았다. 수양대군은 부인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따르고 부인은 독서로 깨달은 학문을 수양대군에게 공부시켰다. 둘의 사랑은 수호랑이를 유혹하는 암호랑이와 같았다. 포천에서 사냥하고 독서하며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스물이 넘어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았다. 수양대군이 포천 왕실 사냥터에서 사냥하는 동안 낙랑대부인은 고려 초에 창건된 운악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불심에 심취했다.
서른이 되는 해에 수양대군이 사병들과 사냥 나가는 길에 낙랑대부인도 무사복으로 차려입고 말을 타고 동행했다. 자주 함께 사냥하였으나 그날은 부인의 차림이 범상치 않았다. 수양대군은 풍채가 위협적이며 인상이 험상궂기가 산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호랑이 못지않았다. 낙랑대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수양대군의 백마를 따랐다. 포천은 한양과 가까워 조선의 태조, 태종, 세종이 사냥을 즐긴 왕실 사냥터로 태종이 들어오는 물은 없고 밖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만 있어 안을 포(抱), 내 천(川)을 써 포천이라 이름하였다.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산줄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거쳐 황해로 흘러갔다. 왕실 사냥터에 도착한 백여 명의 사병들이 말을 달려 용암산과 수리봉에 올라 산 아래 운악산 방향으로 사냥감을 몰아왔다. 수양대군과 낙랑대부인은 수십 명의 사병과 산 아래서 기다리다가 숲에서 뛰어나오는 사슴 두 마리와 반달곰 한 마리를 활로 쏘아 잡았다. 몰이꾼들의 함성이 가까워지고 말발굽 소리에 놀란 표범 한 마리가 숲에서 나와 수양대군과 마주치자 급히 방향을 틀어 운악사 방향으로 도망쳤다. 수양대군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바람처럼 표범을 향해 쏘았다. 사병들이 말을 달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표범을 수양대군 앞으로 가져와 내려놓았다. 다 자란 표범은 호랑이만 하였다. 수양대군이 표범을 발로 밟고 백여 명의 사병들 앞에서 칼과 칼집을 두 팔을 들고 포효했다. -내가 조선의 표범을 잡았도다! -수양대군 만세! 수양대군 만세! 수양대군 만세! 낙랑대부인은 표범 가죽은 벗겨 말리고 고기는 사병들의 잔치에 쓰도록 하였다. 사슴과 곰을 잡아 표범고기와 함께 삶아 늦은 밤까지 잔치가 계속되고 포천현감이 포천막걸리 열 말을 수레에 싣고 와 바치고 갔다. 수양대군은 표범의 고기를 뜯으며 사병들과 막걸리잔을 나누었다. 왕자라기보다 산적 두목과 다름없었다. 수양대군이 부인에게 포천 막걸리 한 잔을 표주박에 따르며 표범고기 한 덩어리를 조선검으로 큼지막하게 싹둑 잘라주었다. 사병들이 부인을 보고 함성을 지르자 낙랑대부인이 단숨에 표주박의 막걸리를 비우고 표범고기를 양손으로 들고 한입 가득 뜯어 물고 씹었다. 사병들이 양팔을 하늘 높이 흔들며 외쳤다. -수양대군 만세! -낙랑대부인 만세! 사병들은 죽음으로 수양대군에 충성할 것을 수없이 맹세하고 낙랑대부인에게도 충성을 외쳤다. 수양대군이 손을 들어 충성 다짐받으며 영원히 함께할 것을 약속하였다. 수양대군이 술에 취해 물었다. -부인, 내일은 어디로 사냥을 나가고 싶소이까? -내일은 물 맑고 산수가 수려한 백운산으로 사냥을 가보고 싶습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운악사에서 말을 달려 해가 뜨기 전에 백운산에 도착해 백운계곡 물줄기가 시작되는 공덕산과 백운산 정상으로 오른 사병들이 사냥감을 몰아 내려왔다. 수양대군과 부인은 백운계곡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었다. 산이 높아 구름에 가리고 골이 깊어 물 흐르는 소리가 광덕산과 백운산에 메아리쳤다.
[송주성 소설가 ] 2014년 금샘문학상 대상 작품활동 시작 2018년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2019년 무예소설문학상 최우수상
[저서] 2018 장편소설 <직지 대모> 2021 장편소설 <국궁> 2023 장편소설 <후쿠시마 참치>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오피니언/ 문학/ 예술/인터뷰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