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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오늘』 노정숙 작가를 만나다

연명지 기자 | 기사입력 2021/05/10 [09:56]

『피어라, 오늘』 노정숙 작가를 만나다

연명지 기자 | 입력 : 2021/05/10 [09:56]

 

  ▲ 노정숙 작가.                                                                                             © 포스트24

 

▶나비도 좋아하는, 꽃을 품은 시인이며 수필가인 노정숙 작가를 만났다.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다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주고 그래도 잃은 건 하나도 없다” 는 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며, 모국어로 웃는 작가에게 오늘은, 늘 새롭고 다정하다. 전화위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남천처럼 『피어라, 오늘』 이 에세이집이  코로나 시대의 위로가 되어 활짝 피어나길 바랍니다.


Q : 『피어라, 오늘』은 어떤 수필집인가요?
A : 제 다섯 번째 수필집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 많습니다.
제1장에서는 널리 알리고 싶은 옛 사람들을 소개했습니다. 남명, 김굉필, 이옥, 이용휴, 노먼 베쑨, 이탁오 같은 분의 높은 실천력과 사상을 재미를 더하려고 1인칭 시점과 편지글, 가상인터뷰 방식도 취했습니다.
 제2장은 우리나라와 그리스와 이탈리아 섬들, 러시아, 인도를 다니며 각각의 주제에 따라 정리한 글입니다. 이국의 풍광보다 사람과 이야기에 매혹된 시간을 누렸습니다. 단편적인 여행 편력이 아닌,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제3장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 바람직한 관계형성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4장, 5장은 ‘천년 학생’의 자세로 수필 앞에 섰습니다. 수필이 인간학임을 다시 깨우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몸의 발견과 생각에 대한 숙고로 얻은 기록입니다. 가족의 죽음과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고유명사가 된 이들의 죽음, 앞으로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고찰을 묶었습니다.
6장은 2014년부터 3년 동안 잡지에 연재한 아포리즘 에세이입니다. 계간지라서 계절에 맞췄습니다. 4계를 더 민감하게 느끼며, 나름의 색깔을 배경으로 사람살이의 순환을 담았습니다. 공을 많이 들인 연재물입니다. 

 
Q : 시인으로 등단도 하셨는데 시와 수필의 이미지는 어떻게 나누고 있나요?

A : 시는 어머니같이 다정하게 대하고, 수필은 아버지처럼 엄하게 대하는 게 제 글쓰기의 자세입니다. 수필에서는 늘 시적장치를 염두에 두고, 시는 단방에 다가가는 선명한 느낌을 선호합니다. 시는 간혹 재미있고, 수필은 쓸수록 어렵습니다.

 

대표수필과 시를 소개합니다.


   「나를 받아주세요」

나 삼문 벼랑에 섰습니다.
내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는 왜 하필 바쁜 시간에 부고訃告냐며 투덜대는 이도 있을 테고, 잠시 추억을 더듬으며 가슴이 저릴 사람도 어쩌다 있겠지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철든 후 내 생은 눈치보기의 연속이었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림없는 일이지요.
내가 떠나는 자리를 찾은 벗에게 두 번의 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슬쩍 웃고 있을 내 영정사진을 보며 혀를 차는 대신 함께 씨익 웃어주길 바랍니다. 축제 같은 이별식이면 더 좋겠습니다. 잔잔하게 읊조리는 연도나 성가가 들린다면 황송하면서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병 없이 앓는 날이 길어지면 장롱이며 서랍 속에 남아있는 것들을 내보내야 하지요. 산 사람의 물건은 숨이 붙어 있지만, 죽은 자의 것은 주인이 먼 곳을 떠나는 순간 함께 숨을 놓지요. 책이며 옷가지며 쓸 만한 것은 서둘러 새 주인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오래 쓴 물건에도 혼이 깃든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새 주인과 정이 들 시간이 필요하지요.
말년에 어머니는 계절이 바뀌면 성급하게 없앤 물건들을 다시 장만해야 했지요. 그때는 필요한 것이래야 보온을 위한 옷가지 정도였지만요. 지나치게 깔끔했던 어머니의 뒤처리를 보며 눈 흘기던 게 어제일 같습니다.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자주 시루떡을 했는데 네모반듯한 것은 모두 이웃에 나누어 주고 식구들은 귀퉁이 세모 조각만 먹었지요. 어머니 심부름으로 음식바구니를 들고 동네를 도는 일은 재미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어머니가 마냥 좋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내 살림을 하게 되면 나만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지요.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는 나중에 알았지만요.


좋은 것을 다 나누어주던 어머니는 마지막 육신까지 가톨릭의과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은 정리할 것도 없었지요. 내게 남은 것은 어머니가 손수 짠 삼베 홑이불과 치자 물들인 명주 목도리가 고작입니다. 나 역시 자식에게 물려줄 게 변변찮아 눈 흘김 당할 건 뻔합니다.
받아주세요. 숨을 놓은 내 육신을 바칩니다. 살아서도 한가롭지 않은 내 삶은 죽어서도 분주할 것 같습니다. 많이 혹사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쓸 만한 두 눈을 굳어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얼른 주겠습니다. 무방비로 열어두었던 두 귀는 지니고 가렵니다. 늘 열어 놓았지만 제 몫을 했는지는 자신 없습니다. 다만 순명을 다하는 귀의 자세를 깊이 새기기 위해서 곱게 거두어 가려합니다.


다 쓰지 못한 뇌는 그대로 반납합니다. 한 번도 명석한 적 없이 궁리만 무성했지요. 제대로 건져 올린 건 없지만 참으로 빡센 노동을 했습니다. 때때로 머리와 엇갈리는 의견에도 잘 버텨준 가슴이 대견합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어깨가 단단하게 굳었습니다. 자주 칭얼대던 오른쪽 어깨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내 등뼈는 일찍이 위엄을 버렸습니다. 심한 스트레스와 쌓인 피로로 근육이 꼬였다고 하네요. 힘에 부친 맏며느리질을 오래하면서 저절로 비굴해졌습니다.
부실한 대로 기꺼운 머리를 겨우 얹고 있는 긴 목은 늘 기울어 있었지요. 마음씨 후한 선배는 내 자세를 보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겸손의 표징이라고 했지만 실은 민망한 얘기지요. 무시로 들끓는 속내를 들키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매스라고하나요 그 벼린 칼로 가슴을 열 때 조심하세요. 늘 대책 없이 두근대던 심장 동네에서 아우성이 들릴지도 모르니까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웅얼거림이 가득할 거예요. 그곳은 아직 연륜이 만들어 준 빗금을 새기지 못했거든요. 수많은 잡것들을 걸러내던 콩팥이며, 쉬지 않고 흐르던 대동맥이며 뇌동정맥은 오래된 고단함에서 비로소 해방될 것입니다.
포르말린에 잠겨 팅팅 불은 나의 몸은 몇 번 더 남은 할 일을 위해 대기할 것입니다. 끝으로 신참 의학도를 맞을 것입니다. 실습실 해부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뼈와 내장이 무사히 해체되고 그들에게 오래 기억되어, 그들이 펼쳐갈 의로운 일에 쓰이기를 바랍니다. 흩어진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올 내 한숨과 눈물이 마지막 부끄러움을 씻어주길 꿈꿉니다.
저기, 삼문 너머 어머니의 모습이 환합니다.

 

 『피어라,  오늘』 아포리즘 에세이. © 포스트24



<아포리즘 에세이>

 

       「피어라, 오늘」

70년을 사는 솔개는 40살쯤 되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노쇠한 몸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반 년에 걸쳐 새 몸을 만드는 것이다. 산 정상에 올라 바위에 낡은 부리를 쪼아서 빠지게 한다. 서서히 새 부리가 돋아나면 그 부리로 무뎌진 발톱과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낸다. 그 후 새 발톱과 깃털이 나와 솔개는 다시 힘차게 새로운 삶을 산다.


시난고난하던 때, 이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우화라는 걸 알았다. 실제로 솔개의 수명은 20년 정도이며 부리가 상한 뒤 다시 자라는 조류는 없다고 한다. 새로운 선택을 할 때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의 의지를 다그치기 위해서 만든 우언이었다. 어쨌거나 맹렬한 행은 고수의 몸짓이다.


그럼에도 나는 쇄신을 생각했다. 머리는 산뜻한 색으로 바꾸고 늘어진 피부는 잡아당기고 부실해진 무릎의 연골도 갈아 끼워 삐걱거리는 육신을 먼저 바꿀까. 대책 없는 호기심과 지치지 않는 역마살을 무질러야 할까. 불쑥불쑥 치미는 부아와 아집, 시시로 들끓는 속은 어쩌나.
아무래도 쇄신刷新에 쇄신碎身할 자신이 없다. 내일을 위해 오늘 고통스럽지 말 것, 오늘 즐거워야 내일도 즐겁다. 다시 제자리다.


사람은 피어날 때는 더뎌도 스러지는 데는 가속이 붙는다. 후반부 시간이 빨리 가는 건 다행이다. 다만 슬로비디오로 이어지는 행동과의 언밸런스를 잘 다스려야 한다.
겨우 한철을 살다 가는 꽃이 말한다.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다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주고 그래도 잃은 건 하나도 없다.'고. 가을이 오면 풍성하게 거두는  게 아니라 또바기 나누면서 그득해지는 비책을 알려준다. 짧은 시간에도 속속들이 여물었다. 그래서 모두 좋아하는 '꽃'인가보다.
우리는 안다, 행복은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걸. 꽃 닮은 사람은 인생의 계절 어디에 서 있든 사랑옵다.
여린 봉오리든 한창 피었든 슬몃 이울어가든, 누구나 오늘이 최고다.

 

 

          「봄봄봄」

언덕배기에 산수유가 선웃음을 날린다.
제비꽃 살풋 고개 숙이고 쑥은 쑥쑥 올라와 푸르른 향내로 길손의 손길을 맞으리.
길가에 넌출넌출 수양버들 팔 벌리니 흰머리 휘파람새 그 품에 집을 짓고,
벌판은 꽉 짜인 풍경화.
실바람에 꽃비가 내린다. 좁은 길 굽은 길 연분홍 점묘화가 지천이다. 벚꽃이 진다고 애달플 건 없네.
봄볕은 벚나무 아래 곳간을 열어 이팝꽃 팡팡 나누네.
이팝꽃 곁 철쭉이 오동통 꽃망울 앙다물고 머지않아 여민 가슴 열어보이리.
꽃비, 걱정 없다.
벚꽃은 바람에 휘날릴 때가 절정인걸. 절정에서 스러지는 저 눈부신 산화, 달콤한 봄날이다.
.....

앞 산, 키 큰 소나무가 팔 벌려 새들을 부르고
단풍나무가 아직 마른 잎을 떨치지 못하는 사이
눈치 빠른 놈은 뾰족 아기새부리 같은 여린 잎을 내밀었다.
허리께서 나긋나긋 진달래 속삭이고, 희고 붉은 철쭉들 수다 질펀하다.
먼데 산 바라보면 여리여리 연둣빛 잔치 한창이다.
진진 초록으로 건너가기 전 말랑말랑한 생명의 시작, 만만 봄이다.
봄산에 들바람이 불면 머리에 꽃 꽂고 싶어지는 날 많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일순 깜깜해지는 모니터처럼
한참 얘기 중에 뚝 끊어지는 수화기마냥 그가 등 돌린 것도 삽시간,
꽃보라 휘날리는 것도 잠깐, 목련이 환한 것도 한 순간
쟁쟁 햇살이 애먼 눈 흘기니 겨우 버티고 선 무릎이 꺾인다.
꽃이 져야 잎이 돋듯, 어제의 그를 보내야 내일이 온다.
가기위해 오는 봄, 가거라 그대.

  

 

<작가의 말>

▷위로가 필요한 나날이다. 
오늘이 최고라고 세뇌하며, 깊고 엄한 시간의 힘에 몸을 맡겼다. 
8년 만이다. 그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추렸다. 모자라고 아픈 걸 어르고 달래며 맺은 열매다. 단내 나는 탐스런 복숭아가 아닌 새들이 입질을 한 못난이 사과에 가깝다. 버려도 아깝지 않겠지만 누군가 그 사과가 꼴보다 맛이 괜찮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오래 앉아 있었고, 골방에서 광장으로, 멀리 중세로도 날아다녔다. 진창과 천상을 오가며 많이 아팠고, 또 힘껏 느꼈다. 허투루 산 시간 없는데 부끄러운 건 피할 수가 없다.  
위로를 찾는다.
내 글쓰기를 도와준 건 남편과 딸의 무관심이다. 그로 인해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들은 자주 책을 선물하며 응원한다. 덕분에 조금 더 눈길이 넓어졌다. 조용한 가족은 드러내지 않고 나를 밀어준다. 나는 모국어로 웃는다.

 

 

 

  

      ▲노정숙 작가


  【약력】

□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 2000년 『현대수필』 봄호에 「말 한마디」로 등단했다.
□ 2012년 〈SDU사이버문학상〉 입상하여 『시작』으로 시 발표
□ 『현대수필』 편집장 역임, 현재 자문위원
  시인회의, 분당수필문학회 동인으로  『The 수필』 선정위원이며
  문예비평지 『창』 편집위원, 성남 문예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 수필집으로 『흐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한눈팔기』
   아포리즘 에세이 『바람, 바람』 (2013년 문학나눔 우수도서)을 출간했다.
□ 제5회 〈한국산문 문학상〉, 제9회 〈구름카페 문학상〉을 수상했다.

 

 

 【편집=이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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