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4)

'백합' 이미지 ① ,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0/05/03 [21:40]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4)

'백합' 이미지 ① ,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0/05/03 [21:40]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4)
                                                
-백합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자태와 향기가 다른 꽃들에 비해 유난히 뛰어난 백합은 보통 순백색의 꽃만 생각하기 쉬운데, 빨강, 오렌지, 파스텔 톤 등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해인(1945~)의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에 실려 있는 시 「백합의 말」은 ‘백합’이 지닌 종교적 생명의식 또는 순결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 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 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굳이 이해인이 수녀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작품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경건함과 절대적 믿음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백합’하면 ‘가을’을 시적 소재로 즐겨 써온 김현승(1913~1975)의 「가을의 기도」도 빼놓을 수 없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기도의 형식과 반복, 변주의 기법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백합의 골짜기’는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마도 시인은 ‘까마귀’에서 암시하고 있는 절대 고독의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 방황이나 고난의 시기를 살아오면서 체험했던, 기독교적 기쁨이나 순수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가하면 유안진(1941~)의 시에선 ‘백합’이 부정적 성격으로 쓰이고 있다. 

 

"나 죽으면/ 맛으로만 남아라/ 향기도 색깔도 모양도 버리고/ 오직 짜디짠 맛/ 정신으로만 남아라/ 살아 내 먹장가슴은/ 나 죽으면/ 연꽃 눈부신/ 진흙못이 되지 말고/ 향기 황홀한/ 백합의 골짜기도 되지 말고”(유안진, 「소금밭」)

 

시인은 “향기 황홀한” 백합이나 “연꽃 눈부신” 진흙못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라, “향기도 색깔도 모양도”없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세 편의 시들이 각각 ‘백합’이 지닌 상징의 편차가 있다. 시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학공간의 ‘백합’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이해인이나 김현승의 시에 보이는 것처럼  다른 어떤 꽃보다도 성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선, 어린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젖을 너무 세게 빨아 그 젖이 땅에 떨어지고, 그 자리에 한 송이 핀 꽃이 ‘백합’이란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성의 ‘젖’과 관련이 있는 꽃이라는 점은 ‘생명’이나 ‘순수’를 떠올릴 수 있으며, ‘젖’이 떨어진 모양과 ‘백합’의 형태적 유사함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백합’의 꽃말이 ‘순결’이나 ‘순수한 사랑’이듯이, 이 꽃을 소재로 쓰인 문학 작품엔 이러한 이미지들이 두루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골짜기의 백합』(방민정 번역)은 젊은 남자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소설이다. 귀족 가문의 차남인 펠릭스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냉대를 받고 자란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앵드르강 유역의 골짜기에 사는 모르소프 백작부인(앙리에트)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녀는 히스테리컬한 우울증을 가진 남편과 병약한 어린 남매 때문에 모성애적 사랑만 펠릭스에게 보일 뿐이다. 더구나 카톨릭 교육을 엄격하게 받은 그녀는 펠릭스의 뜨거운 육체적 사랑을 차갑게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영혼에 만족을 주는 그 신성한 사랑의 끊임없고 가시지 않는 무한한 빛을” 나에게 준다고 주인공은 고백하고 있다.


‘나의 백합같은 우상’이며 ‘나의 생명의 꽃’인 그녀의 플라토닉 사랑에, 이십 대의 청년인 펠릭스는 감동하면서도 지치고, 기어이 육체적 접촉이 배제된 사랑에 갈등을 보인다. 급기야 그는 영국에서 온 후작부인 더들리와 불륜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소식을 공작부인인 어머니에게서 듣게 된 30대의 모르소프 백작부인은 충격을 받아, 사십여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불면의 나날을 보내다가,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삶을 후회하면서 죽게 된다.


그러한 서사의 과정 속에, 주인공 펠릭스는 그녀가 그렇게 ‘마음의 고통’ 속에 괴로워하다가 병이 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더들리 부인과 저지른 경솔한 행동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 용서를 빌며, 서로의 오해를 풀고 마음의 교감을 나눈다.

 

이 작품은 두 캐릭터의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는 비극적 결말구조이지만, 작가는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낭만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제목인 『골짜기의 백합』에서, 독자들은 그녀가 머물고 있는 앵드르강 유역의 ‘골짜기’에 ‘백합’이 여기저기 피어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그녀의 삶과 사랑이 바로 ‘백합’ 이미지이기에 그렇게 제목을 붙인 작가의 의도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짙게 깔려져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들이 ‘백합’을 바라보는 시선은 단지 ‘순수한 사랑’이나 ‘순결’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짙은 향기’일 것이다. 작가 이응준은 장편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 “백합 향기는 적을 쫓는 데 사용된다. 백합 수백 송이를 방 안에 두고 잠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백합은 그 향기가 매우 강하다.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인 에밀 졸라(Émile Zola)의 『목로주점』(박명숙 번역)을 살펴보면 “시퍼렇게 변한 병 속의 물에 잠긴 커다란 백합 다발은 시들어가는 동안 매우 순수하고 강렬한 향기를 풍겼다.”란 표현이 있다. 이 소설은 가난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세탁소 주인인 제르베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방안에선 남편 쿠포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세탁소 내부에서 풍겨나오는 온갖 역겨운 냄새를 압도하는 ‘백합 향기’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은 작가가 파리 하층민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발표 당시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작가들은 ‘백합’의 진한 향기를 다양한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문학 공간에 편입시키고 있다. ‘백합’은 아름다운 형태적 모양 못지않게, 그 ‘향기’가 항상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문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몽십야』를 살펴보자. 제목처럼 열 개의 ‘꿈’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에서 ‘백합’ 이미지가 돋보인다. 이 소설은 ‘꿈’이라는 그 자체가 비현실적 성격을 지니듯이 서사가 황당하기 짝이 없으나, 묘사가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낸다. 주인공이 베갯머리에 앉아 있는데, 옆에 누워있는 여자가 “저는 곧 죽게 됩니다”라고 속삭인다.

 

여자는 반복해서 죽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 한구석에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의 투명하고 깊어 보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가 도저히 죽을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죽으면 묻어주세요. 큰 진주조개 껍데기로 구멍을 파세요. 그런 뒤에 하늘에서 떨어진 별 조각을 주워 묘비를 세워주시고요. 제 묘지 옆에서 저를 기다려주세요. 당신을 만나러 올 테니까요.”라는 유언을 남긴다. 언제 만나러 오겠냐고 묻자 그 여인은 무덤 곁에서 백 년 동안 기다려달라고 한다. “눈동자에서 내 모습이 사라지자”, 그녀는 눈을 감았고, ‘나’는 그녀의 긴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죽자마자 그녀의 유언대로 정원으로 나가서 진주조개 껍데기로 구멍을 파고, 거기에 그녀의 시신을 눕혔다. 흙을 뿌릴 때마다 진주조개 위로 달빛이 반짝거렸다. 동그란 모양의 별 조각을 주워 와서 그녀의 소망대로 묘비를 세우고,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백 년을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이끼 위에 앉았다. 해가 떠오르고 다시 서편으로 기울어지면서 수없이 많은 나날이 지나갔다.


주인공 ‘나’는 어느 날 여자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돌 아래에서 파란 줄기가 내 쪽을 향해 뻗쳐왔다. 주시하고 있는 동안에도 줄기는 계속 자라서 내 가슴 부분에 와서 멈췄다. 흔들리는 가늘고 긴 줄기 끝에 한 송이 꽃봉오리가 꽃잎을 열었다. 새하얀 백합 한 송이가 내 코앞에서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그녀가 ‘백합’으로 환생을 해서, 그녀의 말대로 ‘나’를 만난 것이다. 여기서 ‘백합’ 이미지는 생명의 ‘부활’이기에,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진한 향기’를 통해 환상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더구나 소설 구조의 서사 전개에 ‘백합’에 대한 이야기의 암시나 징후가 없기에, 여인이 아름다운 꽃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나’와 재회하게 되는 극적 장면은 무척이나 경이롭다.


물론 전반적으로 이야기가 황당무계하고 전기적 요소가 짙어, 리얼리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읽고난 후, 독자들에게 와 닿는 잔잔한 감동은 무엇 때문일까.
 
“먼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이 떨어지자, 꽃은 자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찬이슬을 맞은 백합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백합에서 입을 떼며 먼 하늘을 바라보니 새벽 별 하나가 자기 혼자서 깜박이고 있었다.”

 

라는 마지막 표현이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그냥 허무맹랑한 ‘꿈’이야기인 것 같지만, 서사가 동화적이고 몽환적이어서, 각박한 현실에 부대끼며 사는 독자들의 마음에 짙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 여운의 중심에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 작가의 문학적 장치로 잘 스며든 ‘백합’꽃 모티프가 깊게 새겨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또 다른 소설 『그 후』에선 ‘백합 향기’를 통해 캐릭터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좀 전에 미치요가 들고 들어온 백합이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다이스케는 코 끝에 와 닿는 숨 막힐 만큼 강렬한 자극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치워버릴 정도로 미치요에 대해 거침없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미치요는 주인공인 다이스케의 친구와 결혼해 살고 있으나 너무나 궁핍해서, 다이스케에게 돈을 빌리게 되고, 그녀는 그 고마움으로 백합꽃 몇 송이를 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백합의 지나치게 자극적인 향기에 그 꽃을 치우고 싶었으나, 차마 그녀 앞에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그 후』(1909)는 우리나라 최초 현대 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1917)보다 8 년 앞서 발표되었는데, 남녀의 삼각관계를 기본 축으로 그린 연애소설이란 점에선 동일하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 출간.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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