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잎들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옥수수 추억

이지우 기자 | 기사입력 2020/04/29 [07:17]

옥수수 잎들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옥수수 추억

이지우 기자 | 입력 : 2020/04/29 [07:17]

                                    옥수수 잎들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이우중 소설가

 

옥수수가루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1960년대 중반 산골 초등학생 때였다.
6·25전쟁 후 기아에 처한 우리나라에 미국 정부에서 무상 원조로 학생들에게 노랗고 하얀 옥수수 가루를 나누어 주었다. 
그때의 옥수수가루의 이미지는 수많은 별이 모인 은하수를 떠올렸다. 청색 바탕에 하얀 별(성조기)과 알지 못할 은하 세계의 언어(영어)로 표시된 두꺼운 종이 포대는 더욱 동화적인 상상력을 일으키게 하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문양의 포대에 담겨 있는 은하수를 한 양푼씩 나누어 받는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급받은 은하에서 온 하얀 별들을 모아놓은 듯한 옥수수가루로 저녁에는 옥수수 빵을 만들어 먹고 허기를 달랬다. 해가 지고 어두운 밤하늘에는 온통 옥수수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은하수가 가득했다. 가끔씩 별들이 아득한 땅으로 떨어졌다.

 

학교에서 옥수수 가루를 나누어 주기 시작한 몇 년 후 어머니가 가족들을 데리고 야산을 개간해서 옥수수를 대량으로 심었다.  
아버지는 숙명과도 같은 가난에 지쳤는지 술과 노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갔으나 아버지가 농사일을 외면할수록  어머니는 5남매와 할머니를 앞장세우고 논과 밭을 뛰어다녔다.
그 시절 여름. 학교에서 돌아오면 형과 누나 동생과 같이 밭에 나가서 옥수수를 가꾸고 수확하여 오면 밤늦도록 옥수수 겉껍질을 벗겨 옥수수 세 개나 두 개를 1개조로 묶어 도매상과 소매상에 팔기 쉽도록 마무리해야 모두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 껍질을 벗겨 묶여진 옥수수는 새벽에 큰 가마솥에 쪄서 어머님과 큰 누님이 일산 읍내 시장에 팔러 가고, 못생기거나 이빨이 빠진 옥수수는 우리 가족의 식사대용이거나 간식거리가 되었다.

우리 집에서 재배한 옥수수는 동화 나라 은하에서 건너온 별들 나라의 간식인양 생각되어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이 있었는데 그러한 옥수수와의 신선하고 우호적인 만남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시골 읍내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한여름의 7월. 2/4분기 수업료를 못 내서 전전긍긍할 때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었는데 학우들이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고 뛰어왔다. 나와 학우들이 놀란 것은 어머니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옥수수를 담아 팔던 빈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노점(露店)에서 옥수수 팔기에 편리한 몸뻬 차림으로 학교를 찾아왔던 것이다. 구경꾼처럼 학우들이 어머니 주위로 몰려들자 어머니는 옥수수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나에게 던지듯이 건네주고 큰 운동장을 가로질러 쫓기듯이 학교를 빠져나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후 학우들이 쑥덕대고 있었다. 어머니 옷차림새도 차림새지만 어머니 옷에서 옥수수 밭에 거름으로 주던 인분(人糞) 냄새가 난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뛰어가 밭에 나가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가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어머니 옷에서는 흙냄새만 났다. 나는 어머니 옷차림에 대한 꼬투리를 잡고 왜 그런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나서 아들 망신을 주냐고 따졌다.

어머니는 “바쁜데 옷차림이 뭐가 어떻냐!” 한마디 하고는 당신 할 일만 하셨다. 어머니와 다투고 난 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를 도왔던 옥수수 밭일도 하기 싫어져 과외수업 핑계를 대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옥수수 밭일이 끝나가는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 가곤했다. 

 

돌밭이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한 알을 심으면 천 알을 얻는 옥수수를 어머니가 대규모로  경작 하고부터 몇 년 후 그 질기고 험악한 가난도 우리 집을 떠났다. 
가난이 떠나자 나도 고향을 떠나 서울로 학교를 옮기면서 옥수수와 나와의 인연은 멀어졌다.
어머니는 칠순이 넘도록 옥수수 광주리를 내려놓지 못하였다. 읍내보다 이익이 많은 신촌 에서 팔려고 경의선 열차에 옥수수 광주리를 이고 올라타려다 넘어졌다. 그 후유증으로 오랜 동안 고생을 하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3년을 누워 있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후 몇 년 동안은 어머니가 생각나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회한이 몰려와 잠을 못 이루곤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올해로 8년, 그동안 주로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주택으로 옮긴 후, 봄이 되자 옆집과 같이 집 앞 버려진 나대지 30평을 일구었다. 두 집이 합동으로 꽃과 작물을 재배해서 구경도 하고 열매는 똑같이 나누기로 하였다. 옆집에서 구한 유채꽃과 아내 고향인 괴산에서 가져온 찰옥수수를 반반씩 심었다. 그런데 씨를 심은 2주 후 씨에서 조그마한 새싹이 올라와 조금 자라자 그때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돌같이 딱딱해져 갔다. 게으른 나는 물주기를 귀찮아하며 아내에게 비가 곧 올 것이라며 물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뭄이 계속되자 유채꽃과 옥수수 싹이 비실비실하고 힘들어하자 옆집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물뿌리개가 달린 호스를 연결하여 물을 주기 시작하면서 새싹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아내가 투덜거리며, “옆집에서 우리 몫까지 물을 주어 문밖을 못 나가겠어요.” 아내는 옆집에서는 두 번 물을 줄 때 우리도 한 번 정도는 주어야 하는데 당신은 야근 아니면 저녁회식으로 매일 밤늦게 들어와 옥수수는 신경도 안 쓸걸 왜 심었느냐고 따졌다.

 

도시에서 자라 시골생활을 모르던 옆집 젊은 부부는 유채꽃과 옥수수 키우기를 너무 재미 있어 하며 물주기는 당연히 자신들 몫인양 불평 없이 즐겼다. 나는 아내 잔소리에 못 이겨 옆집에서 일주일에 서너 번 물을 줄 때 한 번 정도 주는 것으로 몇 주를 버텼지만 늦은 봄부터 시작된 가뭄은 그칠 줄 몰랐다.
100년 만의 최악의 가뭄, 초여름이 시작되고 옆집 부부가 지방여행을 간 사이 자주 물맛을 못 본 옥수수가 가뭄에 못 견뎌 배배 꼬이고 죽어가기 시작하자 나는 비가 내리지 않는 밤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고 운동장만한 달이 떠있었다. 달 한가운데는 어린 시절 쫓기듯 이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옥수수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다음날부터 나도 퇴근하면 호스를 끌어다가 옥수수에 물을 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옆집은 평소 물주기에 게을렀던 나와는 다른 모습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그 후 옆집과는 일찍 퇴근하는 집에서 물을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유채꽃과 옥수수가 물을 주는 대로 커가자 물주기에 쏠쏠한 재미가 붙은 옆집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물주기를 하고 옥수수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가자 옆집부인은 절약이 몸에 밴 아내에게 “아저씨네 물 값 엄청나게 나오겠는 데요” 하고 아내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면서 자신들이 계산한 수치까지 나 몰래 아내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아내는
  “당신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수돗물 값이면 옥수수 사다가 먹는게 났겠네요” 하고 빈정거렸다. 옆집은 나와 아내의 불화를 조장시키면서 나의 물주기를 단수 높게 시기하였다.
  “애들 아빠가 올해 봄까지는 지방에 숙박출장을 많이 가시더니 초여름부터는 전혀 안 가시네요. 회사에 뭔 일 있나요?” 하고 아내의 염장을 질러 나의 물주기 양보를 은근히 부추겼다. 나는 초여름부터 지방 출장을 동료 직원에게 부탁하거나 2박 3일이 걸리는 출장일을 매일 집에서 하루치기로 다녀온 일들은 아내와 옆집에는 비밀로 하였다. 나는 거기에 더하여 옆집 부부의 외국 여행이나 지방 여행을 은근히 바라며 아내한테 옆집의 동정을 염탐해오게 하였다.


그 후에도 옆집과 우리 집의 옥수수 물주기 주도권에 대한 눈치 보기는 긴장을 더해갔다. 나는 옆집과 비슷한 시간에 퇴근 할 때면 옆집이 주차 시키고 있으면 그쪽이 먼저 옷을 갈아입고 호스를 끌고 나올까 우려해서 내 차를 주차하고는 바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호스를 끌고 옥수수 밭으로 나갔다. 아내가 옆집한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빈정대면서
  “당신 여자 생겼어요! 옥수수는 핑계고 뭔가 수상해. 아니, 옥수수가 그렇게 예뻐 죽겠나? 나한테 그렇게 애정을 쏟으면 인생이 편할 텐데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옥수수는 물 이외에도 애를 먹였다. 잎을 갉아 먹는 병충해가 옥수수가 크기도 전에 잎사귀를 갉아먹고 옥수숫대를 뚫고 구멍을 내었다. 나는 한걸음에 시 농협에 달려가 병충해 약을 사서 뿌렸다. 


옆집에서 나의 열병을 눈치 챈 것은 저녁에 옆집에서 물을 준 흔적이 있는데도 회식을 늦게 끝내고 와서 술에 취해 새벽 2시에 물을 주다가 고3 수험생인 옆집 아들한테 들키고부터 였다. 아내 이야기로는 내가 밤늦게 집에 들어와 옥수수 이파리에 옆집에서 물을 뿌린 것을 손으로 확인하고도 물을 다시 옥수수에 주는 그 광경을 관찰한 옆집 아들이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였는지 이후 에는 재미난 저녁 물주기를 은근히 나에게 양보하는 눈치였다. 
나의 탐욕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옆집에서 일찍 퇴근 할까봐 조퇴를 하고 물을 주었으며, 한번은 옥수수가 물을 기다릴 것 같아 중요한 모임을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핑계를 대면서 빠지고 귀가하기도 했다.
 
무럭무럭 자란 옥수수는 내 키만큼 자라고 옥수수 열매도 튼실하게 영글어 갔다. 하루는 퇴근 후 옥수수부터 물을 주고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졸다가 늦은 밤 옥수수가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슬그머니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내 키보다 커진 옥수수 밭에 앉았다. 길게 늘어진 진초록의 옥수수 잎들은 달빛에 젖어 있고. 하늘에는 작은 구름들 사이로 큰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달과 구름 사이에는 어린 시절의 옥수수 밭이 길고도 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밭 한가운데에서 어머니가 웃으시며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내가 환영을 보고 있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다음날은 먹구름이 일더니 한줄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순식간에 옥수수 밭을 적셨다.  
  
긴 가뭄이 끝나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이우중 소설가

 

 

  〔약력〕

 □ 1997년 KT 문예대상 금상 수상, 2015년 경기도문학상

 □ 2018년에는 KBS와 고용노동부주관 40년 전통의 제39회 근로자 문학상 수상
 □ 2010년 장편소설『신은 한국을 선택했다』외 4권 출판
 □ 전)서울 남산문학회장, 전)성남시 야탑문학회장 역임 

 □ 현)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

 □  http://cafe.naver.com/emlee02     E-mail : emlee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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