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인을 만나다

2월 초에 나온 일곱 번째 시집

연명지 기자 | 기사입력 2021/03/24 [10:52]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인을 만나다

2월 초에 나온 일곱 번째 시집

연명지 기자 | 입력 : 2021/03/24 [10:52]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인을 만나다

 

▶바람이 차갑게 디지털 소녀처럼 감겨오는 봄날, 『천 년 동안 내리는 비』를 출간한 정한용 시인을 만났다. 세상을 향한 시인의 곡진한 노래가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바라며 인터뷰에 응해주신 정한용시인에게 감사드립니다.
 

            ▲정한용 시인.                                                                          © 포스트24

 

Q : 『천 년 동안 내리는 비』는 어떤 시집인가요 ?

A : 지난 2월 초에 나온 저의 일곱 번째 시집입니다. 다섯 번째 시집부터 저는 시집 한 권 전체를 의도적으로 테마화해오고 있고요, 그런 맥락에서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그리고 『천 년 동안 내리는 비』는 제 나름으론 3부작이라 여깁니다.

 

『유령들』은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제노사이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의 인종, 민족, 단체 등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정치 경제 문화적 차별로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제노사이드’라고 부릅니다. 이 시편을 쓰던 당시 저는 몇 년간 제노사이드를 공부하며 정말 끔찍한 인간의 ‘악마성’에 휩싸인 채 보냈지요.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의 탄생』에서는 우리의 삶을 흥미롭고도 재미있게 표현하고자 기획했고, 그 전략으로 채택한 것이 판타지였습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상상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이야기를 통해 현재 삶의 실상이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를 파헤치려 노력했습니다. 많은 독자께서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다행입니다.

 

앞 두 권의 시집을 거치고 나니, 자연스레 ‘과거와 현재가 그랬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게 될까?’라는 질문이 따라왔습니다. 『천 년 동안 내리는 비』는 이 질문에 대한 저 나름의 답입니다.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서 수많은 코드와 살고 있고, 또 살아가게 될 겁니다. 로봇과 함께, 혹은 내가 로봇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번 시집은 이런 세상을 읽고 그것을 보여주고자 애썼습니다. 시인은 현실과 ‘친밀한 적’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Q :  세 번째 그림전시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A : 예. 지금 분당의 한 카페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오픈 중입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요, 원래 제가 그림을 전공한 작가가 아니기에 많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작품일 거로 짐작합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어 책으로 공부를 해온 지는 오래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그리기 작업을 시작한 건 2015년, 오래 근무하던 직장에서 명예퇴직하면서부터였습니다.

 

처음엔 순수하게 먹으로만, 그러니까 수묵화만을 그렸지요. 그래서 2016년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요. 2018년에는 마침 독일의 쇠핑엔에 레지던시 작가로 가 있게 되면서, 한가한 틈을 타 다시 그려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 전시회는 독일 쇠핑엔에서 시작해, 국내에 돌아와서도 여러 군데 순회(?) 전시를 했었습니다. 이번 세 번째 전시에는 40점의 그림을 걸었는데요, 달라진 점이라면 수묵에 더하여 아크릴 색채가 가미되었다는 것입니다. 색을 넣으니 상상력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것 같고, 먹보다는 아크릴이 다루기도 좀 더 편리한 것 같더군요. 지금 코로나로 큰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잖아요. 이번 그림 중 일부는 이런 주제를 나름대로 표현해보았습니다. 아무튼 많은 분이 와서 보시고 격려도 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정한용 시인의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사랑의 기록
 
          학교 화단 옆 간이 테이블
          “상민♥혜준_389일♥♥”이라 써놓은 하얀 글자 위에
          단풍잎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누군가 살짝 부끄럽기도 하겠지,
          어린 연인의 마음을 읽어낸 듯 붉은 잎사귀가 살짝 덮어주고 있다.
          그렇다고 다 가려 속까지 감추면 안 되니
          은근슬쩍 보이게, 하트 반쪽 드러나게 절묘이 균형을 잡고 있다.
          내놓지도 숨기지도 않은 그들의 389일에 걸친
          사랑의 기록,
          테이블에 껌딱지처럼 붙어 잘 숙성되고 있다.
          낮에는 햇살이 쓰다듬고 저녁엔 바람이 핥고 지나가고
          다시 밤이 오면 별들이 오래 들여다본
          그 긴 사연들.
          어쩌면 해와 달이 저 언어를 베껴
          하늘 한 켠에 적어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볼 지도,
          너무 오래 묵은 사랑에 진저리가 나 이 풋사랑이 살짝 부러울 지도.
          별 마다 박힌 우주의 이명이 이슥히 흘러나올 때면
          해와 달이 슬며시 질투하며 투덜대는 소리.
          다시 389일이 지나고
          다시 389광년 멀어진다해도
          사랑은 지겨우면서 지독히 지워지지도 않는 법,
          잘 닦았다 싶으면 캄캄한 우주의 창에 등불을 걸기도 하고
          지치고 힘들 때면 문을 두드리며 울기도 하는 법.
          어차피 사랑이란 온 생애를 다해 견디는 일,
          그러다 끝내 견딜 수 없게 하는 일.
          한 시절의 희망과 기쁨이 가고 다시 한 철의 광기와 절규가 지나가고
          지금 어린 연인의 어깨 위에 초겨울 빛이
          살얼음처럼 빛나고 있다.

 

 


                    성 주일 아침, 아이히만 씨들 
 
          우리 동네 아이히만1 씨는
          주일 아침, 교회에 가서예배를 드린다,
          설교 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발 복권 하나만, 제발,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2 씨는
          빵을 사러 간다, 잡곡빵 주세요, 에그머니 잡곡빵은 다 떨어졌어요,
          모닝빵 한 봉지와 소보루빵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딸 애 주고, 하나는 집 나간 아내, 나쁜 년, 그년을 위해 남겨두고,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3 씨는
          늦은 아침을 먹고 ‘전국노래자랑’을 기다리며 ‘진품명품’을 본다,
          우리 집에도 옛날에 옛날 책들이 꽤 있었는데
          어무이, 그거 다 어디갔능교? 육 년 전에 이사하면서 늬가 다 버렸다 아이가,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4 씨는
          페이스북에 머리를 박고 있다, 눈팅만 했더니 페친에서 자꾸 짤리는 거 같어,
          시발, 즤들은 뭐가잘났다고, 말로만 이빨 까는 새끼들이,
          먹방 사진이나 올리면서, 시바 새끼덜, 욕을 해대는 사이,
          우리 동네 아이히만5 씨는 명품 등산복을 입고
          배낭에 에비앙 물병을 꼽고 동네 뒷산을 오른다, 두 시간이면 내려가니, 
          고향 친구에게 점심으로 칼국수나 먹자고 문자를 날린다,
          갸도 어릴 적 고향 떠나 솔찮이 고생 좀 혔지,
          정오가 가까워져 오는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6 씨는
          택배를 기다리고 있다, 아 좆만 한 새끼들,
          11시에 온다면서 벌써 30분이나 지났잖아, 아 좆만이들이 약속을 안 지켜,
          돈을 받아 처먹고 일을 하면, 돈 받은 만큼 좆나게 뛰어야지, 아 좆만 한,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7 씨는
          종편 뉴스를 보며, 혀를 끌끌,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면서도
          눈을 티브이에 고정시킨 채, 세상 말세야, 저 빨갱이들 다 북으로 보내삐리든지, 
          아 경찰이 물러터져서 탈이야, 싸그리 잡아 족쳐야,
          혀를 끌끌 차는,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8 씨는
          절에 가는 대신 집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
          칠성당에 계신 쥐닭이시여,
          남들에게서 빼앗은 것을 내 주머니에만 넣어주시옵고,
          남들의 목을 졸라 일용할 양식을 내 밥그릇에 가득 넘치게하여주시옵고,
          배를 터지게 하여 주시옵고,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9 씨는 어제 태극기 집회에 나가
          모르는 척 받은 일당을 지갑에 꼬깃꼬깃 감추며, 드러운 새끼들,
          두 장은 더 줘야지,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 10씨는 아이히만11 씨에게 아이히만12 씨 뒷담화를까고,
          같은 시간, 우리 동네 아이히만13 씨는……

                       

 

      ▲정한용 시집                                                                                     © 포스트24


▷이 시집에는 생각하는 기계, 상상하는 기계, 창조하는 기계 이야기가 나온다. 생명의 존재는 태어나서 죽기까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살아 있는 몸 밖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론이다. 정한용 시인의 시는 경계적인 존재와 경계의 융합을 탐색한다. 인간과 기계의 섞임을 넘어 종의 경계까지도 허물어질 것이라고 상상한다. 해체된 몸으로 이른바 '탈영토화'된 세계를 노래한다. 한편 그는 이 세상의 삶은 결코 혼자일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복잡한 관계망과 가혹한 환경 속에서 발버둥치며 생존하는 좆같은 새끼들이라고말한다. 이렇게 합쳐지고 부서진 존재들이 바로 우리 삶의 비루함과부조리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는 ‘저항하는 인간’(호모 레지스탕스)이다. 
                                          -장인수 (시인)

 

 

 

 

   

     ▲정한용 시인

 

 〔약력〕

□ 1958년충주 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과 1985년 <시운동>에 시 발표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 『슬픈 산타 페』, 『나나 이야기』, 『흰 꽃』,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과, 영문시선집 『How to Make a Mink Coat』, 『Children of Fire』를 냈다. 문학론으로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 『울림과 들림』, 『초월의 시학』 등이 있다. ‘천상병시문학상’과 ‘시와시학상’을 수상했다. 미국, 독일, 아이슬란드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했으며, 시작품이 미국, 일본, 캐나다,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시리아, 아일랜드 등에서 현지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편집=이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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