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추천시

'밤의 깊이'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0/04/08 [19:31]

오늘의 추천시

'밤의 깊이'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0/04/08 [19:31]

 

  ▲괭이눈.                                                                                                     © 포스트24

 

                                                          밤의 깊이

                                                                                      정인선 시인

        

 

뒤척거리다가 일어나

밤의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베란다의 창을 열고 손을 펴자

달의 소식이 먼저 도착한다

첫물 빨아 말린 옥양목처럼

푸르스름한 음표들도 들어있다

하프의 현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선율들이

혈관의 벽을 더듬어 들쯤

섬쩍지근하기도 하고 으스스한 소름이 돋는

어둠의 늪에서 보내온 이야기도 왔다

밤의 외면이 어둠이라면

내면은 침묵일 것 같아

어둠의 한 컷을 살짝 들고 안을 들여다 본다

침묵에도 영혼이 있다면 만날 수 있겠다

어둠의 울타리에 조각된 음각의 벽화들

침묵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막寂寞일 것 같은데

텅 비어 쓸쓸하다는 말이 정겹게 들리던 때가 있었다

뭉쳐있는 시간들을 풀어놓기로 했다

태백산 오지의 돌아누운 듯 혼자 남은 오두막집

티베트 고산족의 좁은 들녘에 쏟아져 내리던

별들만 받아놓은 적요寂寥의 밤이 출력되어 나온다

밤의 깊이에 묻어두었던 사경寫經들을

다 볼 수 없는 밤이다

그러나 침묵만이 있어야 할 어둠의 내면에

거추장스러운 것

감추고 싶은 것

체면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쌓여있다

평안이요 휴식이라는 밤이 누명을 쓰고 있는 거다

뭐든 복사가 되고 해체되는 때가 오면

어둠도 침묵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밤의 깊이는 그때까지 고요할 것이다

비와 바람도 복사가 되고

나도 너도 복사가 되면 읽혀질 것이다

 

                                                                                                           『오른쪽이 무너졌어』 중에서

 

 

   

    ▲ 정인선 시인

 

 

 [약력]
 □ 삼척 출생.
 □ 2008년 『문파문학』 등단.
 □ 시집 : 『잠깐 다녀올게』, 『거기』, 『오른쪽이 무너졌어』
 □ E-mail : jslor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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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순미 2020/04/08 [22:13] 수정 | 삭제
  • 달의 소식 듣고 오는 길인데~ 침묵 평안 휴식 감사합니다~^^
  • 생태일선 2020/04/08 [21:52] 수정 | 삭제
  • 밤의 생김새가 그렇게 많은 사태와 사건을 담고 있군요 어둠에 담긴 것들이 표상되는 과정 속에서 존재의 내면을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