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호 시인의 시집을 열면, 먼저 시인의 말에 붙들리게 된다. “ 천개의 당신이 있다. 만개의 당신이 있다. 그 들썩임을 시로 쓴다는 건, 결국 나를 들켜버리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시인의 말을 쓸 날을 기다린다”는 글에 내 마음도 버무려 본다. 겨우내 피고지면서도 다른 꽃들을 부르지 않는 대흥사 동백의 오후가 너무 고요하다. 유월의 비가 파릇파릇 내린다. 독자를 아득하게 할 이 시집에 세상이 감전되기를 바래본다.
Q ; 『 아포가토 』 시집이 담고 있는 정서는 무엇인가요? A ; 시집 「아포가토」 는 각각의 사슬로 끊어져있는 단독의 외로움들을 응집한 일상의 흔적들입니다. 작가 로맹가리는 《새벽의 약속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잃어버린 기회들로 점철되어있다" 라고, 난 그 잃어버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흘러가는 결핍과 허무의 순간들을 붙잡아 시로 복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엔 살아있는 사람의 수만큼 삶, 행복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자 자신의 체험에 따라 아름다움, 슬픔, 고통을 다 다른 강도로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이제 아포가토에 묶인 시들은 나를 떠났습니다. 혼자 절망에 빠져있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한 문장으로 새겨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김순호 시인의 시 2편을 소개합니다.
페르소나
나는 하모니카 구멍 빌딩 속으로 연기처럼 구겨져 닥치는 대로 들어갔지
그곳은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잘 꾸며진 백화점 영화관 서점 식당 카페 등 없는 게 없더군 나는 초미세 현미경을 들이밀어 사람들의 실체를 보고 있었지 모두들 훼손된 영혼을 숨기려는 듯 화려한 가면을 쓰고 과장되게 웃고 떠들어 대더군 곳 곳 마다 사람들이 털어버린 외로움의 파편들이 공기 속을 깔깔대며 떠다녔지 한 사람이 몇 개씩의 가면을 바꿔가며 사용하더군 나도 나를 기막히게 변신시켜줄 폼나는 가면을 찾아 기웃거렸지 그러나 내 외로움은 너무 두꺼워 가릴 수가 없다는 걸 알았어 > 집에 돌아와 발가벗은 몸뚱이를 향해 뜨거운 물을 뿌려댔지 나를 이루고 있는 살갗이 비누처럼 녹아내려 해체되길 바라면서
봄밤
어둠을 삼킨 터널 앞 인적 끊긴 24시 김밥 천국에 앉아 미친 듯 손잡이를 흔들고 달려가는 텅 빈 버스를 바라보며 쓰린 위장을 열어 뜨거운 멸치국수를 담는다
꽃들이 불티 인양 낱낱의 이파리로 떠돌다 얇은 숨을 내려놓는 봄밤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제목은 대부분 명사형名詞形이다. 김순호 시인은 수많은 사물의 이름을 소환하고 그것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 말하자면, 시인은 은유의 먼 길을 가고 있는 거다. 그녀가 이름을 부여할 때, 사물들은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수많은 실존의 풍경들로 변한다. 햇살과 바람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잎사귀들처럼, 그녀의 명사들은 이 이름에서 저 이름으로 움직이며 존재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준다. 은유 이전의 명사들이 사물의 파사드facade라면 은유 이후의 명사들은 사물의 속살들이다.사물들은 시인의 은유를 통해 접히고 구겨지며 수많은 주름을 갖게 된다. 그 주름들 속에는 고독, 죽음, 위선, 우울, 배반, 사랑, 절망, 분노, 소멸의 기의들이 물방울처럼 고여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름의 표면을 스쳐 날면서 의미화의 씨를 뿌리는 새 같다. 그씨들이 발아될 때, 사물들은 겹겹의 의미로 두터워진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약력】 □ 서울 출생 □ 2012년 『시문학 』등단 □ 시집:『보셔요 꽃동산에 봄이왔어요 』 □ 『첨부파일 』 『 아포가토 』
【편집장=이영자(지우)】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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