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어부바, <할머니의 아리랑>

'신협중앙회와 여성조선 주체' 에세이 공모전에서 '우수상' 수상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1/02/16 [22:58]

내 인생의 어부바, <할머니의 아리랑>

'신협중앙회와 여성조선 주체' 에세이 공모전에서 '우수상' 수상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1/02/16 [22:58]

 

  ▲ 장순교 수필가.                                                                     © 포스트24

 

▶ 소녀같은 감성과 포근함이 말솜씨에서 녹아나는 장순교 수필가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어느날 여성조선을 우연한 기회에 들쳐보다 공모전 주제가 눈에 띄어 응모를 했는데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연꽃이 연못에서 피어나 듯 수줍은 미소로 활짝 웃는다.

 

Q : "어릴적 추억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또 수상 소감을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A : "언젠가 꼭 한 번 써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여서 공모에 응했봤어요. 내 인생의 어부바는 몸과 마음으로 기꺼이 등을 내어주는 사랑의 절실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늘 할머니께 감사하며 살았는데 상까지 탔으니 이 또한 할머니가 주신 선물같아요." 라고 대답하며 활짝 웃는 모습이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인터뷰를 응해 주신 장순교 수필가님 감사드립니다.

 

 ▲ <여성조선>「내인생의 어부바」가 실렸다.              ▲ 우수상장.                        © 포스트24

 

 

 ▶우수상을 받은 「내인생의 어부바」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 인생의 어부바

                                                                     -  <할머니의 아리랑>

 

                                                                                                                             장 순 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나의 할머니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이 노래를 하셨다. 힘들고 지칠 때도 한탄처럼 당신의 애환을 노래로 풀어 불으시던 이 노래, 커서 알고 보니 정선 아리랑의 가락이었다. “산천은 유구하여 해 바뀌면 다시 오는데 인생은 어찌하여 한번 가면 못 오는가.” 라며 지어 부르시던 그 가락은 지금도 내 귀엔 가장 슬프고 아름답고 그리운 노래로 남아 어쩌다 들려오면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며 저려온다.

 

세상에 오로지 하나뿐인 할머니의 외아들인 나의 아버진 일제 말기의 만행을 피해 서울 명륜동에서 은행원의 엘리트 직장도 버리고 서둘러 결혼한 신부를 데리고 도주하듯 경북 봉화의 깊은 산골 마을로 낙향을 하셨다. 인척의 단칸방에서 엄마는 배가 불러 왔고 산골에서의 절박한 생활에 경험이 없던 엄마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많이 우셨다고, 내가 중학생일 때 외할머니가 들려 주셨다.

 

가을 들녘이 익어가고 감이 빨갛게 물들어 갈 무렵 엄마는 몸을 풀었지만 열악한 환경애서 난산을 겪으며 산후병을 얻어 삼칠일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단다. 서울에서 여전을 졸업한 20세의 신여성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그 때부터 할머니와 나는 언제나 이인 일체였다. 주변을 맴돌고 서로가 안 보이면 불안하고 놀지도 먹지도 못 하는 운명 공동체.

 

보리방아를 찢던 할머니는 주변에서 놀고 있던 나를 급하게 부르셨고 나는 반사적으로 할머니 치마폭 속으로 숨었다. 찢어지는 굉음을 내며 비행기(B29)가 날아 다녔고 그렇게 6,25 전쟁이 터졌다. 낯선 사람들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잡아 가기도 하며 어수선해 졌다. 그 때부터 할머니 등에서 내리지 못하는 외소 한 아이는 언제나 할머니 곁에서 맴돌았다. 두려움의 순간들이며 이때를 기점으로 모든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가 아닌 할머니라는 충격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우유도 설탕도 없는 산골에서 태어난 나를 할머니는 슬퍼할 사이도 없이 배고파 우는 생명을 키워야 했다. 빈 젓을 물렸고 밥물을 먹이고 젓 동냥을 다니며 등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아이, 젖동냥도 한 두 번이지 어느 날 할머닌 죽을지 살지 모르는 아기를 안고 엄마 산소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넋두리로 산이 울리도록 실컷 울다 내려 오셨다고 하셨다. “너의 새끼 키울 수가 없으니 데려 가던가 젓을 나게 해 달라고.” 그래도 애가 울면 어쩔 수 없이 젓을 물리던 날들, 아이가 잠이 들어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말간 물이 나오더라고 하셨다. 아버지를 키우고 22년 만에, 집요하게 빨아 대는 아기의 힘이 젓을 나게 하여 살릴 수 있었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등은 엄마의 가슴을 모르는 나에겐 따뜻하고 포근한 안심처였다. 언제나 할머니 치맛자락이라도 잡고 닿아 있어야 하고 책가방 던지고 목소리라도 들어야 친구와 놀았던, 육학년까지도 할머니 젓을 만지며 잠들고 눈 뜨면 찾던 나는 할머니의 애닮은 그림자였다.

 

나는 딸이 귀한 집의 삼대 째 외딸로 태어났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으로 자랐지만 먹지 못한 체력으로 비실거리며 늘 잔병으로 두 분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 겨울이면 감기에 백일해를 달고 살고 여름이면 배탈과 학질로 하루걸러 열이 올라 쓰러지면 할머니 등에 업혀 하교를 했다. 포대기 들고 달려오신 할머니, 뜨거운 나를 업고 십리 길을 걸어오시면 모시적삼이 다 젓고 기진맥진 하다고 제발 약을 잘 먹으라고 뭐라 뭐라 하시지만 나는 할머니의 따뜻한 등에서 혼절해버리고, 찬 물수건에 깨어나 보면 할머니 옷은 다 졌어있고 할머니가 베틀에서 짜서 만드신 삼베 포대기도 젖었지만 배탈약도 학질약도 얼마나 쓰던지... .

 

어느 해 가을 논도 밭도 추수를 마치고 추위가 왔다. 황량한 들을 지나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 이웃 마을로 갔다. 할머니를 반기는 집도 모르는 집도 방문하여 콩을 한줌씩 얻어 주머니에 담았다. 그렇게 백 집을 다니며 모은 콩으로 두부를 만드시고 금줄 달은 서낭당 나무 아래서 할머니는 빌며 절을 하시고 나에겐 김나는 두부를 계속 먹어야 한다고 재촉 하셨다. 그래야 기침이 떨어진다고, 그때 질린 두부를 나는 지금도 잘 먹지 않는다.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목숨을 이어 왔다.

 

어린 시절 산을 몇 개 넘어야 하는 할머니의 친정 나들이 길은 나의 가장 즐거운 소풍날이었다. 푸른 소백산 자락 부석사 인근 마을, 함한 산길을 넘고 돌아가는 지루한 길에서 떡을 머리에 이고 타박 걸음 걷는 나를 업고도 발걸음 가볍던 할머니, 지금도 꿈에 한 번씩 나타나는 그 산길은 전설의 고향 같이 무섭고도 험했지만 봄가을의 꽃들과 여름 계곡의 물소리와 할머니의 노랫소리에 귀가 아리고 젖은 눈빛을 잊을 수가 없는, 옛날 동화처럼 아름다운 꿈길인 듯 추억에 잠긴다.

 

어느 해 여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 가다 험한 돌부리에 넘어져 발목을 다쳐서 또 업히게 되었다. 발목이 붙고 저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할머니의 누비포대기에 싸여 할머니 등에 업히고 읍네 한의원으로 침을 맞으러 다녔다. 피를 빼고 무명으로 싸매고 십리가 넘는 길을 한 동안 업고 다니신 할머니, 이제 누비포대기도 할머니 손이 닿던 나의 엉덩이 부분과 졸라매던 끈이 낡아서 속의 솜은 삐져나오고 헐거워졌다. 수명이 다하도록 수고한 포대기를 할머니는 나 몰래 버렸다고 하셨다. 요즘은 보기 쉽지 않은 포대기지만 그때는 포대기가 육아의 기본 필수품이었다.

 

미인에 솜씨 좋은 할머니는 요즘 말로 똑똑하고 부지런 하셨다. 가난한 선비의 아내였지만 양반가의 솜씨로 종가집의 맛깔스런 전통을 이었고 동네 아낙들을 모아 삼베며 목화를 키워 길쌈을 가르치고 누에를 키워 물레를 돌리고 베틀을 놓아 옷감을 짰다. 뜨거운 물에서 풀어내던 고치의 번데기는 나의 고소한 간식이었고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실크 목도리는 오랫동안 따뜻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돌고 도는 인생이란 노래처럼 나도 할머니가 되어 귀여운 손자를 맞이했다. 직장 다니는 딸의 첫째 아기를 키우게 되면서 늘 할머니 생각을 했다. 그 때와는 물질도 환경도 세상도 변했지만 사랑 없이 할 수 없는 육아를 맡으며 내 손끝애서 먹고 자고 커가는 모습에 기뻐하고 웃으며 껌 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업고 시장가고 목욕가고 저녁밥을 지었다. 업히고 나가고 싶으면 아무 때고 포대기 끌고 와 나를 앉으라며 칭얼댔다.

 

뚝섬 한강 수변공원에는 신기한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았던 손자는 멀리서 일하는 포크레인을 보면 등을 치고 펄펄뛰며 가까이 가자고 했다. 나의 등은 내 손자의 침대며 운동장이며 세상을 보여 주는 사다리 같은 것, 기꺼이 제공하는 기쁨의 놀이터였다. 정확한 음감으로 산토끼를 잘 부르며 좋아하던 손자와 동요를 부르며 따뜻한 등에서 잠들어 돌아오곤 했다. 등이 휘고 허리가 아파도 나의 할머니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감사하며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길은 저절로 살아지는 운명처럼 왔다. 삼남매를 잘 키우고 가르쳐 결혼시킬 무렵 경제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고 가정적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집에 천사처럼 태어나 시련을 잊으며 웃음 짓게 하던 손자는 어느새 의젓한 대학생이 되었다. 딸은 그저 엄마일 뿐, 같이 자고 함께 다니고 같이 아파하며 살아온 20여년. 할머니의 큰 사랑의 힘을 세대를 이으며 커가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본다. 포대기의 힘으로 이어진 사랑의 일체감, 뜨거운 체온의 교감은 진한 가족애로 결속됨을 느낀다.

 

늦도록 자식이 없던 할머니는 하나 밖에 낳아 보지 못한 귀한 아들을 칠성님이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아들의 불행을 당신 몸으로 다 겪으시며 아들과 손녀를 위한 기도를 새벽마다 정한 수 올리고 경건하게 하셨다. 보고 배운 습관처럼 나도 늘 감사의 기도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기쁨과 감사함을 담아서... .

 

인생을 거꾸로 돌려 살 수 없어 내리 사랑이라 하지만 철없던 젊은 시절 할머니를 모시고 한 번도 나들이도 못하고 업어드리지 못한 회한만 남아 죄송한 마음이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따뜻하고 잘 살아내야지 하면서 힘을 낸다.

 

한 생명의 생명 값은 얼마나 될까? 새 엄마와 동생이 생기며 할머니와 새 엄마의 갈등 까지 겪으며 키워야 했던 할머니의 수고로움은 얼마나 될까? 일찍 철이든 나는 늘 뭔가를 해야 살아온 값을 할 것 같은 부담감으로 봉사도 하며 살았지만 능력 부족이었다.

 

이제 황혼 길에서 돌아보니 눈물겹지만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과 사랑의 결실로 인생은 역사를 이루는 것임을 깨달으며, 조용히 단풍이 고운 숲을 거닐며 나의 인생도 곱게 물들기를 바라며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끝

 

 

 

   

    ▲장순교 수필가


 □ 『문예운동 수필시대』 수필등단(2011).  현) 활동 중

  현) 『시가힘을 얻을때』 '서울 시단 낭송회' 활동 중
 □ 현) 한국꽃예술작가협회 회원
 □ 현) 연화꽃꽃이협회 부회장
 □ 현) 전국시낭송치유협회 회원
 □ 제31회 경기여성기예경진대회 수필 나들이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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