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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8)

-까마귀 ⓶,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2/05/02 [19:15]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8)

-까마귀 ⓶,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2/05/02 [19:15]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8)

                                           -까마귀 ⓶

 

                                                                                                  한 상 훈 (문학평론가)

 

까마귀1 편에선, 몇 편의 소설들을 중심으로 감상해 보았다. 2편에선 현대시와 외국소설을 중심으로 검토해 본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김소월, <가는 길> 부분

 

임과의 이별에서 오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3음보의 율격으로 표현한 애상적인 노래이다. 이 시처럼 한, 두 시어로 시행을 바꾸는 기교로 화자의 미묘한 내적 심리를 잘 표출한 작품도 드물 것. 1, 2연에선 화자가 이제는 임을 잊고 떠나려 하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내적 심리, 모호하고 유동적인 심리라고나 할까, 인간의 내면적 경계 지점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3연에서 ‘가마귀’가 해진다고 지저귀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가마귀’가 시적 화자인 ‘나’에게 시적 대상인 ‘임’으로부터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머뭇거리면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서정적 주체에게 어서 떠나야한다고 울어대고 있는 것.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정지용의 <향수>(1927)로 들어가 보자.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부분

 

어린 누이와 아내에 대한 회상을 통해, 농촌의 고단한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사철 발벗은 아내’라는 구절은 해석이 헷갈리기 쉬운데, 사계절 동안 농사일에 분주한 시골 아낙네의 모습을 표현한 것. 시골의 초라한 지붕 위로 지나가는 서리 까마귀(가을 까마귀)의 풍경이 회화적으로 조형화되고 있다.

이 시를 보면, 1950년대 불우하게 살다간 이중섭(1916~1956)의 <달과 까마귀>(1954)라는 작품이 겹쳐진다. 그 그림에는 전선 위에서 4 마리의 까치가 모여 수다를 떨고,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또 하나의 까마귀가 보인다, 그 까마귀는 아내와 아이들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이중섭일 것이다.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이중섭의 마음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지용 시인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 

정지용의 <향수>는 농촌 생활이 비록 가난할지라도, 따뜻하고 정겨웠던 공간이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후렴구의 반복을 통해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호소하고 있다.

 

김소월이나 정지용처럼 일제 강점기의 민요풍의 시들이 ‘까마귀’를 통해 시골의 토속적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면, 요즘 현대시에선 “당산나무 꼭대기 까마귀가 마을을 향해 울리는 풍악 소리/ 누군가 먼 길을 떠나가려나 하루의 경과는 더디고/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런 흙집에 들어앉아”(문태준, <흙집의 우울>)나 “갈가마귀떼다. 그들은 굶주린 거지떼로서/ 붉은 하늘을 덮으며 날아간다. // 갈가마귀떼를 황혼의 장관으로/ 물통을 든 나그네는 오래도록 바라본다”(최승호, <갈가마귀떼>)처럼 죽음이나 불안, 허무 등의 어둡고 부정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와는 달리 ‘까마귀’를 시인 자신으로 암시하고 있는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50년대 후반에 발표된 김현승(1913-1975) 시인의 <가을의 기도>(1957)가 그러한 작품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현승은 김남조와 더불어 시문학사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시인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중략-)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가을의 기도> 부분

 

시 전체를 관통하는 기도조의 어조에서 명상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봄이나 여름이 아니라 왜 ‘가을’의 기도라고 했을까. 사색을 통해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호올로’란 시어처럼, 인간 본연의 외로움 속에서 겸허하게 절대자와 영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어느 날 세속적이고 위선적인 삶에 나도 모르게 물들고 있는 자아를 시인은 발견한다. 

그렇게 살아온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 속에서,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한 내면적 몸부림이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라는 구절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 작품은 내적 방황을 통해 도달한 시인 자신의 고독하고도 순결한 영혼을 ‘까마귀’로 비유하고 있다.

 

까마귀가 한 마리 날아왔다

그리고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전나무의 서리 묻은 가지에 앉아

검은 날개를 뽐내는 까마귀

나는 아침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를 쳐다본다

인생은 결국 고독하며

누구나 삶에서 혼자인 것

나는 왜 미처 그 사실을 몰랐던가

까마귀는 알고 있었을까, 눈동자를 빛내며

전나무의 무거운 가지를 흔드는

까마귀, 나에게 말해라

네가 아는 비밀을

너는 저 눈부신 꿈들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때로 반짝이는 것이 있어 바라보면

그것은 슬픔의 검은 신사

까마귀였다

   -류시화, <까마귀에게 바침> 부분

 

전나무의 서리 묻은 가지에 앉아 있는 ‘까마귀’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서정적 주체는 “인생은 결국 혼자이며/ 누구나 삶에서 고독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말하자면, 시인은 ‘까마귀’를 통해, 자아의 내면적 성찰과 속된 현실의 초월을 말하고 싶은 것. 워낙 시인이 속삭이듯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기에, 독자들에겐 연인의 음성처럼 다정하고 은은하게 전해온다. 

21세기는 속도와 변화를 중시한다. 이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현대인들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우리는 잠깐이나마 류시화의 시를 감상하면서, ‘나’의 영혼을 본질적으로 투시할 수 있는 실존적 시간을 만들어본다. 

이 시는, 앞에서 언급한 김현승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의 고독함과도 어딘지 닮아있어 보인다. 

 

외국소설을 몇 편 검토해 보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 번역)에 ‘까마귀’가 등장하는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젊은 지식인이며 작가인 ‘나’는, 친구 스타브리다키가 카프카스에 수천만 동포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 같이 가서 도와주자는 말을 듣고, 고민하다가 거절한다. 

친구는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평소에 말하지 않았냐며, 나의 부정적 대답을 은근히 비판한다. 결국 친구는 “안녕, 책벌레야!”하고 가버린다. 

 

“나는 그날 아침의 빗줄기와 한기. 그리고 새벽의 미명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 내 마음은 무거웠다.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서서히 멀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

화자인 ‘나’는 친구를 홀로 보낸 마음에 자책한다. 헤어지기 직전에 친구가 어떤 제안을 한다. 

“자네나 나나, 죽음의 위기를 맞거든 상대에게 생각을 집중시키는 거야, 이로써 어디에 있든지 서로에게 그 위험을 알리자는 거...” 

친구는 ‘텔레파시’ 같은 것은 ‘믿거나 말거나’지만 한번 해보자고 해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동조한다. 

 

그렇게 절친 스타브리다키와 헤어지고난 후, ‘나’는 친구와 동참하지 못한 이유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자조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는 중에, 아테네의 항구도시 피페에프스의 어느 카페에서 “키가 크고 몸이 가는 60대 노인” 조르바를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맑고 예리했다.” 마침, ‘나’는 크레타 해안에 있는 갈탄광을 개발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결심한다. 탄광에서 십장을 지낸 경력이 있는 조르바는 그곳에 가기를 희망하여, 같이 가게 된다. 즉 두 캐릭터의 삶이 크레타섬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춤과 여자, 노래 등을 자연과 생활 속에서 즐기는 조르바는 항상 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인 ‘산투르’를 갖고 다닌다. 그는 먹고 살기 힘들 때에, 여관을 돌아다니며, 산투르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모자를 벗고 돌면, 돈이 가득 찰 정도이다. 책속의 진실에만 얽매여있던 책벌레인 '나'는 조르바를 통해 생생하고 참다운 영혼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까마귀’에 대한 묘사는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조르바가 모텔 여주인인 오르탕스의 수다를 들어주면서, 가까워지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조르바의 손을 꼭 쥐며 오르탕스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밖이 서늘해졌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대나무 숲 뒤의 바다는 한숨을 쉬었다. 마침내 다시 평화로운 바다가 된 것이었다. 까마귀 두 마리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갔는데 날갯짓 소리가 흡사 비단을 찢는 소리 같았다.” 

우선, 이 장면에서 작가의 배경묘사가 아름답다. 여기서 ‘까마귀’는 캐릭터의 심리나 복선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단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비단 찢어지는 소리’의 날카로움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두 번째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의 거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데, 바로 친구의 죽음을 상징한다. 

 

“나는 저항하려고 했다. 나는 잠에게 항복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떴다. 까마귀의 일종인 알프스 까마귀가 바로 내 앞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푸르스름한 깃털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아래로 꼬부라진 노란 부리가 똑똑하게 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새가 불길한 전조인 것 같아서였다. 나는 돌맹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 알프스 까마귀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날개를 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잠이 나를 덮쳤다. 겨우 몇 초도 못 자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알프스 까마귀가 내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바위에 기대어 몸을 떨었다. 불길한 꿈이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다.” 

화자인 ‘나’는 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다가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까마귀’가 있어, 돌멩이를 던져, 날려 보내고 나서, 불길한 생각을 갖는다. 계속 몰려오는 잠에 가위눌리다가, 겨우 일어나니 바로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친구와 ‘약속’한 것을 떠올린다. “내 친구에 위험이 닥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스타브리다키! 스타브리다키! 스타브리다키!” 결국, ‘나’는 얼마 후 “스타브리다키가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타난 ‘까마귀’는 우리 소설처럼 죽음이나 불길함을 예고한다. 특히 카잔차키스는 화자의 내면적 자의식을 표출하는데, ‘까마귀’를 매우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인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마담 보바리』(김화영 번역)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 보바리 부인은 시골 의사인 남편 샤를르에게 결혼생활의 권태를 느끼고, 로돌프와 레옹을 차례로 만난다. 그녀는 그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삶의 활기를 찾는다. 하지만 그러한 불륜의 사랑을 거치면서 온갖 사치를 부리다가,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급기야 경제적 빈곤 속에서 파산할 지경에 이른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통해 임시변통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워낙 빌려 쓴 돈이 많아 회복 불능의 절망적 상태에 놓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옛 연인 로돌프를 찾아가 삼천 프랑을 빌려달라고 간청하나, 그는 차갑게 외면한다. 

 

“그녀가 괴로운 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치 부상당하여 다 죽어가는 사람이 피가 흐르는 상처를 통해서 생명이 새나가는 것을 느끼듯이 그녀는 그 기억들을 통해서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밤이 내리고 있었고 까마귀떼가 날았다.” 

작가 플로베르는 엠마(보바리 부인)의 절망적인 내면세계를 그리면서, ‘까마귀’를 통해 캐릭터의 어두운 심리와 죽음(자살)에 대한 징후를 이처럼 은유적으로 그려나간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의 『아버지와 아들』(이항재 번역)에 나타난 ‘까마귀’ 이미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나 플로베르와는 다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의학을 전공한 주인공 바자로프는, 친구 아르카디가 카챠와 결혼하려는 것을 알고, 빨리 보금자리를 만들고 자식도 많이 낳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구간 지붕 위에 나란히 앉은 갈가마귀 한 쌍을 가리키며” 저 새를 잘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르카디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자네는 박물학에 너무 약하군. 갈가마귀가 가장 성실하고 가족적인 새라는 걸 잊어버렸나?” 하면서,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따뜻한 말을 전하고, 그와 헤어진다. 

‘갈가마귀’는 까마귀 종류 중에서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우리가 보통 보게 되는 까마귀와 달리 목 뒷부분의 흰색이 가슴과 배 쪽으로 폭넓게 이어져 있으며, ‘캬, 캬, 캬’ 하고 운다. 바자로프의 말대로 아르카디는 양가의 환영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러시아 문학에도 ‘까마귀’가 죽음의 징후를 나타내는 작품들이 있겠지만, 『아버지와 아들』에 등장하고 있는 ‘갈가마귀’는 부부애가 좋은 정겹고 다정한 새로 표현되어 있다. 크기도 작고, 다른 까마귀보다 흰색 부분이 몸에 넓게 퍼져 있기에, 귀엽기도 해서, 바자로프가 친구의 결혼에 대한 덕담으로 비유한 것이다.

 

 

 

 



 

 

 

 

 

 

 

 

 

 

 

 

 

  ▲한상훈 소설가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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