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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7)

-까마귀 ⓵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2/04/02 [14:05]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7)

-까마귀 ⓵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2/04/02 [14:05]

         ▲까마귀.                                                                                    © 포스트24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7)

                                            -까마귀 ⓵

 

                                                                                                       한 상 훈 (문학평론가)

 

까마귀는 몸 전체가 검은 잡식성의 새로, 무척 영리하다. 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 섬에 사는 까마귀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먹이를 찾는다. 심지어는 쓰기 편한 도구를 만들어 쓸 뿐만 아니라 그 도구를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간수해 두기까지 하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야생에서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서 개미굴 속의 개미를 꺼내먹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곳의 까마귀들은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를 가졌다는 침팬지의 두뇌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까마귀는 불길함이나 죽음의 징후가 강하다. 흉조의 이미지는 우리 정서의 심층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반드시 흉조의 고정적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있다는 발이 세 개인 ‘삼족오’(三足烏)의 까마귀 그림이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대무신왕의 ‘붉은 까마귀’ 이야기에는 신성한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나 반포지효(反哺之孝)의 까마귀 이야기 역시 신성성이나 길조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문학텍스트엔 까마귀를 죽음이나 변고 등 불길함의 징후가 널리 편재되어 있다. 이번 글에선 3편의 소설을 통해, 이러한 흉조의 이미지가 문학속에 어떻게 굴절되어 있는지 감상해 보기로 한다.

 

우선, 월북 작가인 이태준(1904~?)의 단편 「까마귀」(1936)로 들어가 본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는 독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소설가이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워져 친구의 별장을 빌려, 시골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 그 별장의 근처에는 전나무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까마귀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까마귀에 대해 불길한 선입관이 들었지만, 그냥 친구처럼 생각하고 나날을 보낸다. 그렇게 지내던 중,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별장 근처에, 산책 나온 젊은 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의 열렬한 독자이지만, 폐병 환자로 삶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두 사람의 대화 도중에 “까악까악-하는 소리”가 바로 그 전나무에서 들려와 그녀는 깜짝 놀란다. “선생님은 친구라구꺼정! 전 이 동네가 모두 좋은데 저게 싫어요. 죽음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구 자꾸 깨쳐주는 것 같아요.” 까마귀 울음소리에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마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아와 앞을 설 것만 같이···” 

극도로 쇠약한 그녀에게 그 새의 울음소리는 마치 죽음의 전주곡처럼 다가온다. 

 

이 소설은 한적한 시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남녀의 이야기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사랑과 이별이 중심 서사로 전개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선 죽음을 앞둔 여인이기에 특별하다. 남자에겐 그녀에 대한 연민이 애정으로 변해 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낭만적으로 전개되는 것일까. 

 

작가는 빠른 서사의 전개보다는 캐릭터의 심리 묘사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까마귀’의 이미지가 중요한 문학적 장치로 설정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차 둘 사이는 애틋한 감정이 싹튼다. 거기까지다. 둘 사이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그 후에는 오직 그(소설가)의 그녀에 대한 상상의 세계만 펼쳐질 뿐이다. 즉 그녀 못지않게 그의 내면적 감정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혹시 그녀가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면, 삶에 애착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남자가 있냐고 넌지시 물어본다. 

“그 여자에게 애인이 없으리라 단정한 자기의 어리석음을 마음 아프게 비웃었고, 저렇게 절망에 극하여 세상 욕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거룩한 여자를 애인으로 가진 그 젊은 학도가 몹시 부러운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 삶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비관적인 발언을 한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정혼한 남자가 있으나,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나의 삶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실존적 불안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애인이 없다면 그 빈틈을 파고들어 자기가 ‘애인’이 되고자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애인이 있다고 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소설가는 실망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선 ‘까마귀’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배를 갈라서 그 속에는 다른 새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내장뿐인 것을 보여주리라.” 

그는 ‘까마귀’가 다른 날짐승처럼 평범한 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그녀의 ‘죽음’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까마귀를 잡아, 해부하기에 알맞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중에, “두어 대의 검은 자동차와 함께 금빛 영구차 한 대”가 동네에 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폐결핵 못지않게 ‘까마귀’에게 강박적인 공포를 계속 받고 있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작가 이태준은 그녀의 시신이 있는 영구차 주변의 하얀 눈 이미지와 작품 공간의 지배적 코드인 까마귀의 검은 색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킨다. 그것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작가는 이 소설에서 까마귀가 흉조로서 인식되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그대로 문학 속에 기호화하여 투사시키고 있다.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와 함께 인물의 심리 및 암시에 ‘까마귀’ 이미지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단편소설이 지닌 묘미를 멋있게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현기영(1941~)의 중편 「도령 마루의 까마귀」(1979)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작가의 대표작인 「순이 삼촌」과 더불어 ‘제주도의 4·3사건’을 다루고 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폭도’라고 불리는 좌익 무장대와 군경 합동 토벌군 사이에서 고통을 당하는 양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리얼하게 재현한 것이다. 

주인공 귀리집은 영순이 어멍과 같이 도령마루에서 성을 쌓는 울력꾼으로 동원이 되어 있었다. 그 지긋지긋한 노동이 내일이면 끝나는 것. 축성을 하는 이유는 좌익 무장대로부터 양민들을 차단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울력꾼들은 여편네들과 열두서너살짜리 어린 것들이 대부분이고 어른 남자라곤 벌초한 봉분처럼 머리가 민둥한 중늙은이들이고 젊은축들은 별반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젊은 남정네들은 산사람들과 경찰들 틈바구니에서 의심받고 쫓겨다니는 상황이었다. 

 

주정공장에 서무 일을 보는 귀리집 남편인 순원이 아방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솔밭에서 생솔가지를 한 짐 지고 내려오다가 넘어져 갑자기 돌아가신다. 그런데 시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 온 사람들 중엔, 남편과 가까이 지냈던 산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누가 보았는지, 장례가 끝나자마자, 지서에서 경찰들이 와서 남편을 잡아간 것이다. 

“아무리 산폭도라 하지만 일년 전만 해도 친구로 지낸 처지인데다 명색이 조문이라고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신고할 수 있겠는가.” 

남편은 지서에서 밤새도록 고문을 받은 후, 집에 와서 몸져 눕는다. 그런데, 그 사이 남편을 산으로 데리고 갈 목적으로 ‘폭도’들이 온다. 하지만 처참한 남편의 모습을 보고, 할 수 없이 그냥 가버린다. 

남편은 언제 산으로 끌려갈지, 아니면 괜한 의심으로 지서에 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양쪽 사이에서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그는 소학교에 다니는 아들 순원이와 집을 나와, 읍내로 피신을 간다. 우리 민족의 이데올로기적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던 중, “상주된 몸으로 삭망제”에 자주 빠지는 게 도리가 아니라 하여,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거기서 “두 명은 구구식총을 메고 한 명은 철창을 들고” 있는 산사람들에게 끌려가고 만다. 귀리집이 이 사실을 지서에 알렸지만, 오히려 ‘폭도 가족’으로 낙인이 찍힌다. 

 

이러한 형국에, 순원이 아방(남편)이 산에서 탈출해서, 가족들 얼굴만 보고 피신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폭도’들이 밤중에 내려와서,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집을 불태운다. 시어머니는 “오목가슴에 죽창을 맞고서, 흰옷 위에 불티가 까맣게 내려 앉아 있었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귀리집은 ‘폭도가족’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아들 순원이는 어디로 가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귀리집은 걱정이 태산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자랐기에, 그들의 응어리진 내적 고통을 문학공간에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시대적 증언이, 주인공인 귀리집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 이 소설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마치 역사의 현장에 와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까마귀’는 어떠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는가. 우선 도령마루에 성담을 쌓는 울력꾼들을 감독하고 통솔하는 ‘오순경’의 별명이 ‘까마귀’이다. 

“닛뽄도로 멀쩡한 사람 모가지를 겨누고 혼겁하게 으름장 놓던 저 작자도 같은 무리다. 일본순사가 조센징 목 치던 그 끔찍한 닛뽄도를 새나라 새 경관이 써먹다니! 저 까마귀 오는 삼팔따라지 이북 출신이다.” 

이북출신인 오순경은 이곳 섬 출신 순경보다 몇 배나 더 양민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 악명이 높다. 귀리집도 몇 번이나 혹독하게 당한 적이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생김새도 꼭 ‘까마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저 순경 옷이 어쩌면 저렇게 까마귀 날갯죽지 색을 닮았을까. 게다가 바람에 날아갈세라, 턱끝까지 내려매고 눈썹 위로 푹 눌러쓴 모자 차양도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다.” 

인용한 대목처럼 ‘까마귀’는 부정적 캐릭터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한 마디로 잔혹하고 나쁜 사람으로 부각된다. 까마귀의 부정적 이미지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더욱 심화된다. 

 

시신들을 먹거리로 삼아 몰려드는 새까만 까마귀떼들의 풍경. 잔혹서사의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장면이다. “짐작대로 사람 죽은 밭이다! 동편 밭담 아래 송장들이 서로 포개져서 늘비하게 널브러져 있다. 그 위를 까맣게 내려앉은 까마귀들이 사람들을 보자 까악까악 요란하게 우짖는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까마귀들은 좀처럼 날지 않는다. 오히려 까악까악 더 기승부리며 마치 사람들에게 대들 듯이 보인다.” 

오순경의 명령에 의해 도령마루에서 돌을 나르는 부역일을 하다가, 귀리집이 영순이 어멍과 함께 몇몇이 이동을 한다. 그곳에 까마귀들이 몰려있어, 처음에는 말들의 사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산에 피신해있던 사람들의 시신들이 있었다. 까마귀 오순경이 이 송장들을 밭 가운데 있는 구덩이에 넣으라는 것이다. 

“귀리집은 까마귀 부리에 쪼인 시체 얼굴들이 차마 끔찍하여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은데, 웬일인지 자꾸 눈길이 눈망울 파먹힌 그 흉측한 얼굴들에게 간다.” 

그녀는 혹시 내 남편이 이 시신들 속에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얼굴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다행히 다른 시체 밑에 들어가 있어서 까마귀 부리에 쪼이지 않은 채 온전한 얼굴, 구레나룻이 사뭇 자라 얼굴을 반쯤 덮고 있지만, 그건 깔축없이 순원이 아방이다.” 

영순이 어멍이 가리키는 시신에서 귀리집은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곤, 그나마 얼굴이 까마귀에게 파먹히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통곡하기보다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곤 남편의 시신을 오순경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따로 빼내어, 담 밖으로 던져 놓는다.

 

이 소설에서 ‘까마귀’는 오순경 같은 부정적 인물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동물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잔혹한 이미지의 분위기를 만드는 소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까마귀의 어두운 이미지를 적극 문학공간에 펼쳐나가, 제주 4.3사건에 의해 희생된 선량한 서민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철우(1954~)의 연작소설인 『황천기담』(2014)의 첫 번째 이야기인 「칠선녀주」를 감상해 보자. 여기서는 개인의 내적 심리나 영상적 효과가 아니라, 재난이나 변고의 징후로 까마귀가 사용된다. 징후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현기영보다 이태준의 소설 모티프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당신’은 작가다. 출판사의 재촉에 쫓겨, 평소에 구상하던 소설의 재료를 찾기 위해 작가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호리병 형태의 분지를 발견하곤, 그곳의 마을을 찾아 들어간다. “당신은 첫눈에 그 기이한 황색의 하늘과 마을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당신이 찾던, 소설 속의 마을과 거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황천’이란 ‘노란색 표지판’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면서, 작가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는 ‘노다지’라는 모텔에 여정을 풀고, 그 모텔의 주인 남자를 통해 이 마을의 과거의 내력을 듣는다. 

 

이 마을은 원래 작은 화전민촌이었으나, 개울가에서 황금덩이가 발견된 후 외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금광업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각축전이 벌어졌다는 것. 갑자기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드는 바람에 ‘술장사’가 대단했는데, 그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여자가 황금심의 할머니라는 것이다. 

그 황금심의 딸이 ‘홍녀’이고, 작가는 그녀를 이미 마을 입구에서 본 적이 있다. “백팔십 센티미터 정도의 훤칠한 신장. 운동선수 같은 단단하고 건장한 체구. 낡은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군화 비슷한 목 긴 가죽구두 차림.” 대단한 거구의 그 여자의 취미가 ‘까마귀’만 눈에 띄면 엽총으로 쏘곤 한다는 이야기를 주인에게 듣는다.

그렇다면 홍녀는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물론 까마귀에 대한 적대적 감정의 표현일 것이다. 홍녀 집안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녀의 할머니인 ‘옥봉’은 동동주로 마을에서 인기를 얻어 돈을 엄청 벌게 된다. 하지만 한일합병조약 이후 일본의 자본가들이 대거 황천읍에 몰려들면서, 금광채굴권이 일본인한테 넘어가고, 왜식 요릿집이 판을 치게 되어, 옥봉이 운영하는 명월옥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거기다가 옥봉이 상해 임시요원을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순사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아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되고, 이로 말미암아 명월옥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던 중 옥봉이가 마법의 신제품인 ‘칠선녀주’를 만들어 놓아, 다시 도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명월옥은 단숨에 황천 술꾼들의 신성한 성지가 되어 경성의 이름난 술꾼들과 호사가들까지 줄을 지어 찾아들었다.” 이처럼 옥봉이가 전성시대를 누린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마을에 대재앙이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갑자기 금광의 채굴작업이 중단되고, 이 마을에 “무시무시한 폭우가 퍼붓기” 시작한다. 그뿐 아니라, 여기저기 사고가 나서 수백 명이 죽게 되고, “정체불명의 치명적인 역병이 급속히” 퍼져 나간다. 

그리하여 마을의 주민들이 다 이곳을 떠나고, 급기야 옥봉은 딸 황금심에게 가업을 반드시 일으켜 세워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지하실에서 숨을 거둔다. “난리 통에 두루미들도 오래전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신 어디선가 엄청난 까마귀떼가 몰려와 산과 마을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뒤란 솥밭도 그 숯덩이 같은 새들이 차지했다.” 이러한 이유로 홍녀는 ‘까마귀’만 보면 총을 쏘아대는 것이다. 

 

작가는 모텔로 들어와서 사내에게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 때문에 잠을 들지 못한다. 더구나 “허공을 뒤덮고 날아가는 까마귀떼를 향해 홍녀가 자꾸만 총을 쏘아”대는 모습이 떠올르는 것. 이 글에서 작가 임철우는 황천 마을이 흥하고 망하게 되는 급변의 과정을 길조의 ‘두루미’와 흉조의 ‘까마귀’로 대립화시켜 보여준다. 

이것은 흰색과 검은색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면서, 두 새에 대한 우리민족의 심층에 자리잡은 원형적 인식을 전략적으로 글쓰기에 도입한 것이다. 다분히 환상적 분위기가 현실의 바탕에 접목된 서사이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소설이라 하겠다. 

 



 

 

 

 

 

 

 

 

 

 

 

 ▲ 한상훈 문학평론가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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