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 (8)

박완호, 이슬 비친다는 말,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0/11/20 [18:24]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 (8)

박완호, 이슬 비친다는 말,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0/11/20 [18:24]

 

  © 포스트24

 

 

이슬 비친다는 말,

이슬 비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긴 밤 지새며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만 내내 따라 불렀지요 그게 얼마나 반짝이는 건지, 아무래도 풀섶 이슬에 내린 첫 햇살만큼은 아닐 거라 여겼지요 그게 얼마나 아픈 말인지, 옛날 첫사랑 눈가에 서린 물기처럼 아릴까도 싶었지요 어쩜 그 말이 내 귓속을 처음다녀간 엄마 것이었는지, 그이 속살을 바싹바싹 파고드는 환한 통증이었을지, 불현듯 가슴 한쪽이 물컹해지기도 했지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몰라도 찬바람에 절로 나오는 눈물 따위야 비길 게 못 된다는 것쯤은 진작 알았지만요
              -「이슬 비친다는 말,」 전문,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시인동네, 2020)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에는 물과 관련된 이미지가 몇 편 등장한다. 물에는 다른 소재와 달리 고통과 신선함이 동시에 들어 있다. ‘텅 빈 우주’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여정이 “적막의 자궁”을 찢으면서 탄생했기 때문에 시인은 그 비어 있는 칸들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중이다.


이전 시집에서 물과 관련된 이미지는 가난과 자책이라는 내밀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신과 시인과의 관계가 아닌, 시인 자신과 자신의 내적 관계에서 실체를 추구한다. 예컨대 “구겨진 꿈들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종이박스를 끌어안고 선잠 잔 아이의 머리에 내려앉은 하얀 꽃잎”(「사월의 푸른밤」)이었고, “물고기를 놓친 허공의 자책”(「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는」)이었으며, “너는 나를 부르지 못하고, 나는 너를 부를 수 없어” 소통이 부재된 공간이었다.(「압록 애인」) 그야말로 내면은 허공이고, 그 허공 속에서 시인은 빈 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이슬 비친다는 말,」은 위와 같은 특성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의 신성한 물과 생명의 탄생이라는 굵직한 물 이미지로 변화한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 놓여 있던 시인이 “찰나의 발자국 소리”를 통해 신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블랙 코드」) 이때 이미지의 내밀성은 ‘이슬’을 통해 신과 시인과의 풍요로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증거로, 신의 발자국 소리는 ‘첫 햇살’이고, 신이 준 창조의 흔적은 ‘이슬’이다. 이슬은 산징(産徵)이면서 신의 또 다른 신비이다. 시인이 비록 ‘이슬 비친다’는 말의 의미는 모르지만 ‘이슬’이 신의 신비인 것쯤은 인식하고 있다. 공감의 의미로 시인은 가슴 한쪽이 물컹해지는 것을 느낀다. 물질에 대한 인식이 탄생에 대한 인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시의 상징에서 볼 때, ‘이슬’의 이미지는 ‘대지의 성수’를 상징하고, 출산의 ‘이슬’ 이미지는 봄물인 ‘신선함’을 상징한다. 결국 긴 밤을 뚫고 지상에 내려온 ‘이슬’이나, 출산 징후를 알리는 ‘이슬’은 한 생명체의 탄생과 결부된 신성한 물의 이미지다. 시인은 태모와 관련된 물의 사이클을 첫사랑 여인-엄마-그이로 계열화시킨다. 이처럼 물의 이미지는 시적 특성의 실질적 뿌리인 여성성을 통해 출산에서 오는 감각적 가치를 보편적 원형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슬’과 ‘이슬’에 대한 탄생은 시인에게 새로운 가치관의 전환점으로 귀결된다. 시적 차원에서 보면 탄생은 자신의 작법으로 지면을 채워나가야 할 시쓰기의 자각이고,(「사월 초하루」) 또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면 한 생명이 누군가와 마주칠 한순간을 위해 “외길이라는 이름의 세상 한가운데”(「외길」)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박완호 시인 약력: 충남 진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외 4권의 시집이 있다. <김춘수 시문학상>, <시와시학 팔로우시인상>을 수상했다. <서쪽> 동인. 현재 풍생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권영옥 문학평론가

 

 

 [권영옥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 경북 안동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시론서 『한국현대시와 타자윤리 탐구』, 『구상 시의 타자윤리 연구』.
 □ 시집 『청빛 환상』, 『계란에 그린 삽화』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 전 상지대, 아주대 외래교수, 현재 《두레문학》편집인, 문예비평지 『창』편집위원
 □ <두레문학상>수상.
 □ 이메일 : dlagkwnd@hanmail.net.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포토
1/13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문학/ 예술/인터뷰 많이 본 기사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