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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9)

국화 이미지 ⓶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기사입력 2020/10/02 [09:07]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9)

국화 이미지 ⓶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입력 : 2020/10/02 [09:07]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9)
                                                                  -국화⓶


                                                                                                    한 상 훈(문학평론가)


 
‘국화 이미지 1편’에서는 일본 현대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선 우리 소설과 영국소설을 감상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김하인(1962~)의 장편 『국화꽃 향기』부터 보기로 하자.
오래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인기가 높았던 김하인의 장편 『국화꽃 향기』는 죽은 여자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소설이다. 
수려하게 잘생긴 대학 신입생인 승우는 대학 연합 써클인 CDS에 가기 위해 지하철 2호선을 탔다가, 우연히 그 써클의 회장인 미주를 만나게 된다. “승우는 그녀의 머릿결 가까이에 코를 대고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틀림없는 국화 내음이었다. 야생의 싱그러움과 햇빛 분말이 노랗게 날아다니는 듯, 은은하면서도 담백한.” 처음에 그는 단지 샴푸 냄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 감을 때 비누를 사용하고, 머리 감은 지도 사흘이나 되었다고 쑥스럽게 말한다.
이 글에서 ‘국화 향기’는, 이성에 대한 애정을 자각하기 이전의 본능적 감각이다. 작가는 ‘사랑’의 순간적 시그널을, 후각적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다. 


서울권 대학 영화 동아리인 CDS에서 같이 일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승우는 3살 연상의 미주를 사랑하지만, 미주는 오직 후배로서 대한다. 동아리에 미주와 절친한 친구인 의대생 정란이가 승우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의 마음이 미주에 가있는 것을 알고 겉으로 표현 하지 않는다. 삼각관계로 표면화되기엔, 승우의 감정이 절대적이고, 미주와 정란의 사이가 무척 돈독하다. 
어느 날 승우는 정란에게 사람이 평범한 비누를 쓰는데, ‘국화 향기’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하냐고 묻는다. 정란은 “마음속에 그 사람이 들어와 아름답고 달콤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마법” 같은 말로 설명하면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몇 년이 흘러간다. 미주는 충무로의 어느 영화사에 소속되었고, 조연출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기가 감독할 시나리오 작업에 1년 반 동안 칩거하면서 매달려온 2편을 완성했지만, 영화 제작자들의 협조를 얻지 못해 고전 중이다. 승우는 군에 갔다온 뒤 졸업하기 직전, 이미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덕분으로 ‘한밤의 팝세계’의 진행자로 발탁됐다. 둘 사이에 특별한 만남 없이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승우는 “지금까지 단 하루도 미주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호텔 커피 숍에서, 각자 일 때문에 다른 사람과 만남이 있었다. 승우가 먼저 미주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뒤따라나가 극적인 재회를 한다.

 

이 소설의 이러한 우연한 만남 설정이, 본격 문학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재회 후에 두 사람은 다소 갈등은 겪는다. 하지만 결혼에 성공하고, 승우의 방송 진행과 미주의 영화 만드는 작업은 잘 풀려나간다. 그러던 중 미주는 임신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 정란이가 미주의 건강 체크를 한다. 정란이는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란다. 멜로드라마의 주요 콘셉트처럼, 행복한 가정에 갑자기 찾아온 재앙, 미주는 위암 말기인 것이다. 
미주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양자택일의 선택이 운명처럼 놓여 있는 것이다. 자기의 삶이냐, 아기를 살릴 것인가.
의사는 남편인 승우에게 말한다. “아무리 모성애가 강하다고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아기를 선택하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인은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심적 고통을 겪은 뒤에 결정하셨을 겁니다.” 전형적인 통속 소설의 서사가 의외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 듯이, 이 소설의 작가도 그러한 정석을 잘 구사하고 있다. 제왕절개 수술이 잘 이루어진다. 아기는 예상대로 살아나고, 미주는 얼마 못가서 죽고 만다.


죽기 직전에 미주는 정란에게 남편과 아기를 부탁한다. 대학 때부터 정란이가 승우를 사랑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란은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못한다. 
정란은 승우에게 “미주는 내 친구야. 미주는 아내와 엄마라는 두 자리를 비웠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주미의 엄마역할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미주가 이 세상에 없어도 승우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푸르른 하늘에서 불현듯 거대한 은행나무 잎들을 흔드는 한줄기 바람이 휘, 하고 불어왔다. 승우의 앞 머리칼을 바람이 흩뜨렸다. 그리고 그 바람 줄기 속에서 문득 국화 향기가 났다. 싸하고 달콤하며 연한 국화 향.....국화 향이었다.”

 

이처럼 작가는 그리움에 젖어있는 승우의 내면세계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국화 향기’의 후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국화 향기’의 서정적인 분위기가 캐릭터에 대한 연민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비극적이지만, 순정적 사랑의 결말로 아름답게 마무리되기에,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공무도하가’나 ‘가시리’처럼 전통적 정서인 가버린 임에 대한 정한의 이미지가 우리의 심성의 바닥에 흐르고 있어, 이러한 슬픔을 지닌 소설이나 시가들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엔 데이비드 로렌스의 「국화 냄새」로 들어가 보자.
『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데이비드 로렌스(David Hervert Lawrence)의 초기 단편 「국화 냄새」(백낙청 번역)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소설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오렌스가 어린 시절 실제로 겪었던 체험과 가까운 친지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만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광부의 아내 베이쯔는 어둑해질 무렵, 5살된 아들 존과 함께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길가에 헝클어진 분홍빛 국화”가 덤불에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 그녀(베이쯔)는 아들이 “볼썽사나운 국화꽃다발에서 꽃잎을 뜯어내 한움큼씩 길에다” 버리는 것을 보고 나무란다.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창백한 꽃 서너 송이가 달린 가지 하나를 꺾어” 얼굴에 갖다대더니, 버리지 않고 “앞치마 띠에 꽂아”두고 집으로 들어선다.

 

중심 캐릭터인 광부의 아내 베이쯔와 ‘국화’의 관계는, 일상에 지치고 의욕이 없는 노동자의 아내와 길가에 무심하게 피어있는 꽃이기에 쉽게 겹쳐진다. 그녀가 국화를 대하는 풍경은 결코 행복한 모습이 아니다. 앞치마에 국화 몇 송이를 꽂아두고 오는 행동거지가, 서민적인 그녀의 삶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국화’ 이미지는 빈곤에 지친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의 사물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남편과 같이 일하는 광부들은 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남편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술집에 들렀기에 오지 않는다고 그녀는 투덜댄다. 기척이 있어 남편인가 했더니 학교에 간 큰 딸이다. “앞치마에 꽃을 꽂았네요!” 그녀는 무심히 잊고 있었는데, 딸아이가 앞치마에 꽂힌 ‘국화’를 보고 예쁘다고 난리다. 가난 때문에 감정이 무뎌진 그녀는, “국화송이들을 입술에 갖다대면서” 감탄하는 딸아이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추억에 잠긴다. “내가 너희 아버지와 결혼할 때도 국화였고, 너희들이 태어날 때도 국화였어.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들이 술에 취한 너희 아버지를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도 네 아버지는 단춧구멍에 갈색 국화를 꽂고 있었어.” 아내의 앞치마와 남편의 단춧구멍의 ‘국화’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서로 조응을 이루며, 친밀감과 사랑을 함축하고 있다.

 

그녀(베이쯔 부인)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국화’와의 각별한 인연을 잠깐이나마 아이들에게 자랑하듯이 말했지만, 결코 행복한 상념은 아니었다. 더구나 현재의 가난한 생활 속에서, 늦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점차 분노를 느낀다. “자기들 세 사람에게 이런 고통을 가져다주는 애들 아버지에 대한 노여움으로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남편과 같이 일하는 이웃집에 가서 동료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술집에도 없다는 등 근심이 증폭된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찾아와서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며, 통곡한다.

 

잠시 후에, 남편의 동료들이 남편의 시신을 들고 들어온다. 탄광촌에 남아 야근을 하다가 갱의 일부가 무너져 질식사한 것이었다. 그녀는 울고난 후, 차분하게 남편의 시신을 모셔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정리한다. “촛불이 촛대의 유리에, 분홍빛 국화가 몇 송이 담긴 두 꽃병에, 침침한 적갈색의 식탁에 깜박거리는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방안에는 차갑고 죽음 같은 국화 냄새가 가득했다.” 작은 방(응접실)으로 남편의 시신이 들어오고, 시어머니와 같이 남편의 시신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서, “그에 대한 슬픔과 연민”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동시에 그녀는 일상의 빈곤에 치여 별로 고민해보지 못했던 생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인다.

 

작가 로오렌스는 이 소설에서 탄광촌의 실상과 광부들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또한 서민적이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국화’ 이미지로, 인물들의 심리를 재미있게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는 가볍게만 보이는 ‘국화’ 이미지가, 서사의 후반부에 이르러,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로 돌변한다. 길가에 흔하게 피어있는 ‘국화’가, 남편의 시신이 놓여있는 방에선, ‘죽음’의 분위기를 지닌 소도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화’는 복합적인 성격의 꽃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다가오며, 제목처럼, 국화 ‘향기’보다는 ‘냄새’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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