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9)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몇 년이 흘러간다. 미주는 충무로의 어느 영화사에 소속되었고, 조연출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기가 감독할 시나리오 작업에 1년 반 동안 칩거하면서 매달려온 2편을 완성했지만, 영화 제작자들의 협조를 얻지 못해 고전 중이다. 승우는 군에 갔다온 뒤 졸업하기 직전, 이미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덕분으로 ‘한밤의 팝세계’의 진행자로 발탁됐다. 둘 사이에 특별한 만남 없이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승우는 “지금까지 단 하루도 미주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호텔 커피 숍에서, 각자 일 때문에 다른 사람과 만남이 있었다. 승우가 먼저 미주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뒤따라나가 극적인 재회를 한다.
이 소설의 이러한 우연한 만남 설정이, 본격 문학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재회 후에 두 사람은 다소 갈등은 겪는다. 하지만 결혼에 성공하고, 승우의 방송 진행과 미주의 영화 만드는 작업은 잘 풀려나간다. 그러던 중 미주는 임신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 정란이가 미주의 건강 체크를 한다. 정란이는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란다. 멜로드라마의 주요 콘셉트처럼, 행복한 가정에 갑자기 찾아온 재앙, 미주는 위암 말기인 것이다.
“푸르른 하늘에서 불현듯 거대한 은행나무 잎들을 흔드는 한줄기 바람이 휘, 하고 불어왔다. 승우의 앞 머리칼을 바람이 흩뜨렸다. 그리고 그 바람 줄기 속에서 문득 국화 향기가 났다. 싸하고 달콤하며 연한 국화 향.....국화 향이었다.”
이처럼 작가는 그리움에 젖어있는 승우의 내면세계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국화 향기’의 후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국화 향기’의 서정적인 분위기가 캐릭터에 대한 연민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비극적이지만, 순정적 사랑의 결말로 아름답게 마무리되기에,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공무도하가’나 ‘가시리’처럼 전통적 정서인 가버린 임에 대한 정한의 이미지가 우리의 심성의 바닥에 흐르고 있어, 이러한 슬픔을 지닌 소설이나 시가들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엔 데이비드 로렌스의 「국화 냄새」로 들어가 보자.
광부의 아내 베이쯔는 어둑해질 무렵, 5살된 아들 존과 함께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길가에 헝클어진 분홍빛 국화”가 덤불에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 그녀(베이쯔)는 아들이 “볼썽사나운 국화꽃다발에서 꽃잎을 뜯어내 한움큼씩 길에다” 버리는 것을 보고 나무란다.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창백한 꽃 서너 송이가 달린 가지 하나를 꺾어” 얼굴에 갖다대더니, 버리지 않고 “앞치마 띠에 꽂아”두고 집으로 들어선다.
중심 캐릭터인 광부의 아내 베이쯔와 ‘국화’의 관계는, 일상에 지치고 의욕이 없는 노동자의 아내와 길가에 무심하게 피어있는 꽃이기에 쉽게 겹쳐진다. 그녀가 국화를 대하는 풍경은 결코 행복한 모습이 아니다. 앞치마에 국화 몇 송이를 꽂아두고 오는 행동거지가, 서민적인 그녀의 삶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국화’ 이미지는 빈곤에 지친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의 사물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녀(베이쯔 부인)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국화’와의 각별한 인연을 잠깐이나마 아이들에게 자랑하듯이 말했지만, 결코 행복한 상념은 아니었다. 더구나 현재의 가난한 생활 속에서, 늦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점차 분노를 느낀다. “자기들 세 사람에게 이런 고통을 가져다주는 애들 아버지에 대한 노여움으로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남편과 같이 일하는 이웃집에 가서 동료에게 물어도 보았지만, 술집에도 없다는 등 근심이 증폭된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찾아와서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며, 통곡한다.
잠시 후에, 남편의 동료들이 남편의 시신을 들고 들어온다. 탄광촌에 남아 야근을 하다가 갱의 일부가 무너져 질식사한 것이었다. 그녀는 울고난 후, 차분하게 남편의 시신을 모셔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정리한다. “촛불이 촛대의 유리에, 분홍빛 국화가 몇 송이 담긴 두 꽃병에, 침침한 적갈색의 식탁에 깜박거리는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방안에는 차갑고 죽음 같은 국화 냄새가 가득했다.” 작은 방(응접실)으로 남편의 시신이 들어오고, 시어머니와 같이 남편의 시신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서, “그에 대한 슬픔과 연민”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동시에 그녀는 일상의 빈곤에 치여 별로 고민해보지 못했던 생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인다.
작가 로오렌스는 이 소설에서 탄광촌의 실상과 광부들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또한 서민적이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국화’ 이미지로, 인물들의 심리를 재미있게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는 가볍게만 보이는 ‘국화’ 이미지가, 서사의 후반부에 이르러,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로 돌변한다. 길가에 흔하게 피어있는 ‘국화’가, 남편의 시신이 놓여있는 방에선, ‘죽음’의 분위기를 지닌 소도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화’는 복합적인 성격의 꽃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다가오며, 제목처럼, 국화 ‘향기’보다는 ‘냄새’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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