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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20)

할미꽃 이미지,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기사입력 2021/09/02 [19:16]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20)

할미꽃 이미지,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입력 : 2021/09/02 [19:16]

              

  © 포스트24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20)

                                                    -할미꽃 

 

                                                                                          한 상 훈(문학평론가)

 

 

4월 중순쯤 되면 할미꽃이 핀다. 이 꽃은 붉은빛을 띤 자주색이다. 흰 털이 많은 꽃줄기의 끝에 한 개의 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인데, 무덤가에서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곳이 큰 나무가 없고, 양지바르고 건조하기 때문이다. 흰 털로 덮인 열매의 덩어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백발을 흩날리는 노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서 할미꽃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노고초(老姑草) 또는 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부른다.

이꽃의 꽃말은 슬픈 추억 또는 슬픔이지만 ‘지조’의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할미꽃에 '지조'는 왜 연관시킬까. 길고 굵은 뿌리를 땅에 박고 자라는 이 꽃을 사람들이 뽑아서 딴 곳에 심으면 거의 다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필 무덤가 같은 곳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 사람들은 말하지 다소곳한 자태! 더러는 그녀에게서 외진 데 거하는 이의 슬픔을 읽기도 하지 그럴 때면 그녀는 어깨 더욱 곱수그려 삐딱하게 머리채 흔들며 킬킬, 혼자 웃는다네”(김선우, 「할미꽃」)라는 시적 표현은 바로 할미꽃의 그러한 속성을 근거에 둔 것이다.

 

계간 《문예중앙》(1977, 겨울호)에 발표되었던 박완서(1931~2011)의 단편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으로 들어가 보자. 박완서는 우리 현대소설사에서 박경리(1926~2008)와 더불어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여기서 ‘여성문학’이라는 것은 20세기 말에 여성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유행했던 젊은 여인들의 바깥 세계에 대한 일탈이나 센티멘탈한 정서를 주로 그린 작품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모성적인 껴안음과 희생이 주조를 이루는 전통적 정서의 소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소설은 6.25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 전쟁의 잔혹성이나 동족상쟁의 이데올로기적 비극이 소설의 공간에 관류하고 있으나 작가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그 점보다는 여성의 전체적 삶 속에서, 즉 소녀, 처녀, 아내, 어머니 등을 거쳐 ‘할머니’라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 지점에서 삶의 존재론적 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화자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욕되도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파라든가 할머니라든가 하는 중성적인 호칭이 안 어울리는 강력한 여자다움을 못 버렸었다.”

 

작가는 이처럼 소설 속 캐릭터를 통해 ‘할머니’라는 명칭보다는 여성인 젠더로서의 사회적 존재감에 강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비록 인생의 황혼기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그 시기에 불려지는 ‘노파’나 ‘할머니’라는 명칭을 작가는 거부한다. 몸은 늙었지만 마지막까지 당당히 여성으로서의 풍부한 모성과 생명력이 작동되고 있음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놀라움을 준다. 놀랍다는 것은, 이 작품이 40여 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박완서라는 비범한 작가가 그 당시에 이미 노년의 여성적 삶에 대한 진보적 의식을 적절하게 예견하여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할미꽃’이란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이 소설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할머니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작가의 말대로 단지 동시대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두 할머니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달래봉 산제당에 모신 산신령”을 정성을 다해 모시는 ‘달래마을’이라는 어느 산속 농촌에서 벌어진다. 마을 청년들은 몇 달 동안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군 또는 인민군으로 지원하거나 끌려가서, 마을에는 ‘젖먹이 빼곤’ 여자들만 남아있는 상황이 되었다. “서로 모함하고 싶고 죽이고 싶은 충동”은 마을 어귀에 있는 ‘분교 건물’에서 왔는데, 거기에 국군 또는 인민군이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 미운 사람들을 빨갱이로 고발하기도 하고, 반동으로 쳐죽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마을에 여자들만 남게 되자 사람을 죽이거나 끌고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분교 건물’의 주인이 국군도 인민군도 아닌 양코배기란 소문이 돈다. 그리고 양코배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마을을 기웃거리며 “색시 해브 예스? 색시 해브 예스?”하고 여자들만 눈에 띄면 이상한 몸짓을 하고 이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여자들은 기겁을 하고 집 안 깊숙이 도망친다. 미군들이 양색시를 찾는 눈치고, 순박한 마을에 그런 여성들이 있을 까닭이 만무다.

밤이 되자 미군들은 “발정한 맹수의 울부짖음처럼” 외치고 다녔고, 여자들은 공포감에, 그 마을에서 제일 웃어른이 되는 노파가 살고 있는 큰 집으로 모여 들었다. 모여든 여자들은 강제로 양코배기들에게 당할까봐 두려움 속에 몸을 떨곤, 차라리 이럴 바엔 죽기를 자청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노파는 “죽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것들이..”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양코배기들의 색시 노릇을 대신 하겠다는 것이다. 즉 미군들의 욕망의 제물로 스스로 희생양이 되고자 한다. 그러한 노파의 속마음을 모르고 주변의 새댁과 처녀들은 깔깔거리며 주책이라고 난리다. 노파는 망령나지 않았다며 위엄을 지니고, 손녀인 옥희에게 화장품을 가져 오라고 한다. 노파는 새댁의 능숙한 화장술에 얼굴을 맡긴다. 너희들이 양코배기들의 얼굴을 보면 나이 분간이 잘 안되듯이 그들도 우리를 보면 마찬가지라고 한다.

드디어 노파의 화장은 완성되고, 대문이 열렸고, 거구의 양코배기가 들어서서 예쁜 색시로 분장한 노파를 번쩍 안고 지프차를 타고 가버렸다. 분교건물에 들어서자 노파는 침대로 내팽개쳐지고, 그 상황 속에서도 노파는 감당해야할 미군들의 숫자를 살펴보았다. 대여섯 명 정도였다. 거구의 양코배기가 밝은 불빛 아래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듯 한 겹 두 겹 힘 안들이고 노파의 옷”을 벗겼다. “칠 남매에게 진액을 다 빨리고 이제 늑골과 상접할 만큼 말라붙은 지 오랜 젖가슴과 겹겹의 주름 사이사이에 칠남매를 길러내느라 늘어나다 못해 터졌던 자국이 물 마른 운하처럼 남아 있는 끔찍한 뱃가죽”이 밝은 불빛 아래 드러났고, 노파는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그 웃음소리는 티없이 맑고 즐겁게 들렸다. 누군가가 노파를 일으키고 옷을 주워서 주었다. 노파는 나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가하고 겁이 났으나, 양코배기들은 노파를 지프차에 태워서 먹을 것을 상자에 담아 큰 집으로 돌려 보냈다. 노파는 집으로 돌아와서 맛있는 것이 가득들은 상자를 꺼내놓고 젊은 여자들 앞에서 곧 위엄을 회복하고 자기가 방금 겪은 모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전선에서 묘한 풍문이 나도는 가운데 시작한다. 그 풍문은 전쟁에서 “숫총각이 전사하는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숫총각의 병사들은 이 소문을 듣고 불안감에 휩싸이고, 이를 간파한 중대장은 한 시간 정도의 외출을 허락한다. 숫총각의 김일병은 어느 작고 초라한 집을 밀고 들어섰다. 그 집에는 외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노파가 홀로 살고 있었다. 김일병은 노파와 대화를 하면서 친근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군에 오긴 전에 시골에 두고 온 애인인 혜숙이 이야기에서부터 숫총각이 총알을 제일 먼저 맞는다는 부대 내에서 떠도는 풍문까지 모두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김일병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니까 그 노파는 총각을 면하고 가고 싶지 않냐고 다정스레 묻는 것이다. 

“미신이건 뜬소문이건 좋다는 거야 왜 못 하우. 목숨은 중한거라우. 더군다나 기다리는 아가씨까지 있다며.”

김일병은 질겁하지만 할머니의 유혹에 넘어간다. 노파는 어서 불을 끄자며 자기는 아직 정정하다고 안심시킨다. “노파는 뜻밖에도 풍요한 가슴과 부드러운 살결을 갖고 있었고, 손길은 섬세하다 못해 기교적이기까지 했다.” 

어둠 속에서 노파는 여자가 되어 있었으며, 김일병은 숫총각을 면하게 된다. 다음에 또 오라는 노파의 말을 뒤로 하고, 김일병은 부대로 가면서 그녀를 경멸한다. “저 나이에도 그 행위에 대한 기쁨”이 있었던가. 김일병은 그녀에게 불결한 혐오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전투에서 살아난 김일병은 드디어 제대하게 되고, 들뜬 마음으로 고향에 갔다. 그러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애인 혜숙이는 이미 시집을 가버렸다. 그는 혜숙이의 배신과 노파의 ‘또 와요’하던 표정을 생각하면서, 여자들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그 후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지만, 참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도 낳고 철도 들게 된다.

세월이 흘러 그가 오십을 바라보는 김사장이 되고나서, 그는 젊은 날에 관계를 맺은 그 노파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를 그토록 징그럽게 하던 노파의 ‘환희와 만족’의 표정조차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무의식적인 “휴머니즘에서 나온 발로”가 아니었을까. 자식과 같은 자신과 적극적인 육체관계를 맺은 것은 그 노파의 성적인 탐닉이 아니라 이상한 풍문의 징후에 갇혀있던 나에 대한 헌신적인 모성으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작가 박완서는 그 노파들은 죽는 날까지 ‘여자’였다고 말한다. 즉 제목의 ‘할미꽃’이 시사하듯 그들의 몸은 말랐지만, ‘마른 꽃’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작가가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할머니나 노파라는 명칭을 부정하고, 굳이 ‘여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을 일으킨 야만의 남성과 대비된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돌출적인 ‘남성’을 언제나 모성의 품에 안고 평화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여성의 생명력. 그것은 여성에게 죽을 때까지 영원하다는 것이다.  

 

# 이 평론은 1년 8개월 동안 연재해온 ‘꽃’ 이미지 마지막 글입니다. 다음 달엔 ‘새’ 이미지를 갖고 독자 여러분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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