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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15, -우노 지요 「소슬바람일까」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5/01/19 [18:35]

문학 산책 15, -우노 지요 「소슬바람일까」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5/01/19 [18:35]

                                       

  © 포스트24

 

                                      문학 산책 15

                                           - 우노 지요 「소슬바람일까」

 

                                                                                                   한 상 훈  문학평론가 

 

몇 번에 걸쳐 시공간에 나타난 감나무, 느티나무, 동백꽃 등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본다. 일본의 여류작가의 단편을 감상해 본다. 

우노 지요(1897~1996)의 단편 「소슬바람일까」는 백세를 살아온 작가가 80대에 쓴 서간문 형식의 ‘기억 상실’ 모티프 소설이다. 

 

우선 그녀의 삶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우노 지요는 일본 혼슈의 서쪽 끝에 있는 야마구치현 태생으로, 1921년 25살 때 어느 신문에 단편 「분칠한 얼굴」이 당선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그녀에겐 유명한 일화가 따라 다닌다. 1929년에 『호지신문』에 「양귀비는 왜 붉은가」를 연재하던 중, 소설 속 남녀의 정사 장면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다가, 당시 ‘정사 사건’으로 사회에 풍파를 일으켰던 화가 도고 세이지를 취재하기 위해 그를 만나게 되는데, 취재에 잘 응해준 도고 세이지와 인연이 되어 몇 년 동안 동거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엔 초등학교 임시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동료 교사와 사랑에 빠져 학교를 퇴직한 적도 있다. 이처럼 그녀는 결혼 전에 남자 관계가 다소 복잡했으며, 결혼도 두 번 했으나 두 번 다 이혼한 거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우노 지요는 자기 자신의 소신대로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 작가다. 한때는 일제치하의 식민지 시대에, 경성에 와서 몇 달 살다가 돌아가기도 했는데, 젊었을 때부터 잡지사의 사무직, 호텔이나 레스토랑 종업원에 종사하였으며,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문학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번에 소개할 「소슬바람일까」도 그러한 그녀의 삶의 흔적에 문학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작용했을 터. 소설 속 이야기는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젊은 시절 같이 지낸 남자의 딸인 유키코가 주인공 야에코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사카구치 야에코 선생님, 저는 유아사 쇼키치의 딸, 유키코입니다. 제 이름을 말씀드려도 언뜻 떠오르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유아사 쇼키치란 이름은 설마 잊진 않으셨겠죠. 지금으로부터 40년전쯤, 선생님은 일년 중 반 정도는 오사카에서 지내셨죠.

아버지는 바로 그 무렵 선생님의 친구였습니다. 흔해빠진 연인 따위가 아닌, 그 이상의 깊은 관계로서 말이죠. 아버지는 센바에 있는 오카무라 주식 회사의 간부였지요. 선생님은 그때 오사카 호텔에서 남편인 사이조 레지 화백의 작품전을 열고 있었는데, 오사카신문사의 후원도 있고 해서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더군요. 아버지는 그 전시장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났다고 했죠. 그때 선생님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간부라고는 하지만 사십도 채 안 된 아버지의 눈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딸인 나에게까지 소상한 이야기를 했을 정도니까요.

그후 아버지는 자나깨나 오직 선생님 생각뿐이었습니다. 사장인 오카무라 씨가 하리마 지방에 있는 우레시노라는 깊은 산중의 온천으로 선생님을 초대했을 때도 자청하여 안내를 맡았을 만큼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오카무라 씨는 우레시노 온천 가까이에 소유하고 있던 은광에서 새로운 광맥이 발견됐다던가 하여 야단법석을 피우고 있었을 때로, 선생님이 광산 따위에 흥미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묻지 않고 그 온천으로 초대했다더군요.

온천에 당도한 것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지요. 산골의 온천 여관들이 대개 그렇듯이 저녁 식사로는 조촐한 산채 요리가 나왔지만, 큰 접시에 수북이 담긴 잉어회 안주에다 산골의 기생들까지 불러서 그럴싸한 주연이 베풀어졌다더군요. 술자리가 끝난 뒤, 일행은 모두 취해서 그 자리에 곯아떨어졌대요. 조그마한 온천 여관이라 이부자리도 변변히 준비되지 않았던지 다들 그대로 섞여서 자게 됐다더군요.

한참 후 아버지는 ”이런, 이불도 차버리고! 감기 들려구“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생님 것임에 틀림없는 향수 냄새가 가까워지더니, 어깨에 이불을 덮어 주는 인기척을 잠결에 어렴풋이 느꼈다더군요.

그리고는 순간 누군가가 옆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이불 속에 몸을 감췄으며, 부드러운 육체의 감각에 잠을 깬 것은 밤도 어지간히 깊어진 뒤였다군요. 날이 밝아 베갯머리까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어이, 모두들 일어나! 산에 올라간다“ 하며 소란들을 피울 때까지 아버지는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죠. 선생님과 아버지가 처음으로 맺어진 것은 그때였다더군요.

-「소슬바람일까」에서

 

이 편지에 의하면, 그 당시 오카무라 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유키코의 아버지는 오사카 호텔에서 당신(야에코)의 남편이 작품전을 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처음 만났다는 것이다. 그 후 사십이 아직 안된 나이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반해버렸다. 어느 날 아버지 회사의 사장이 회사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광산이 있던 “깊은 산중의 온천”에서 주연을 베풀던 때에, 당신을 초대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술에 취해 잠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아버지가 숙박하던 온천 여관에 “이런 이불도 차버리고! 감기 들려구”하는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당신이 아버지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날 밤이 계기가 되어 당신과 아버지의 밀회가 계속됐다. 그러니, 아버지는 회사 업무가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잔업 때문에 아버지가 늦는구나 하시며 기다리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도 애처롭게 보였다. 아버지는 드디어 회사의 공금에 손을 대게 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신 남편의 그림을 수십 점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발각되고, 아버지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가 헤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이야기는 젊은 시절에 야에코가 유키코의 아버지를 이용하여 남편의 그림을 수십 점을 팔았고, 그로 인해 유키코의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버렸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 호텔에도 야에코 선생과 자주 가곤 했지”라는 말을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은 기억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어머니는 병환이 나서 죽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당신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 딸은 과거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야에코에게 편지를 쓴 것일까. 더구나 아버지는 현재 살아있는 것일까. 독자들이 궁금해 할 때 딸의 편지 속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이곳 미노의 다쓰다 병원에서 생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심장 우측에 동맥류가 파열하여 다량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수술을 위해서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이다. 이웃에 살던 정원사인 노모토라는 사람이 “30만 엔짜리 차용증을 지참하고” 선생님 댁을 방문할 테니 도와달라는 이야기다. 

 

“설마 생의 마지막에 서 있는 아버지에게 고작 30만 엔 정도의 돈을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쓰여진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야에코는 매우 불편해 한다. 돈도 적은 돈이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편지를 쓴 유키코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와 처음 밤을 보냈다는 어느 산골의 광산이 있는 온천은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스스로 그렇게 ‘남자’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밤을 보내고 나서 밀회를 계속했던 사건을 기억 못할 수가 있을까하고 의아해 한다. 그녀는 그 당시 돈을 구하기 위해 남편의 그림을 팔려고 돌아다닌 기억은 있다. 

 

“그때의 가슴속은 마치 소슬바람이 휘몰아치는 심경이었다.” 

 

말하자면 ‘남자’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남자의 딸인 유키코가 말한 여러 정황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생각나지 않고, 주변적인 배경만 떠오른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편지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본다. 유키코란 젊은 여자가 돈을 우려내기 위해 거짓으로 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딸의 아버지와 나는 젊은 시절에 보통 깊은 관계가 아닌데, 왜 떠오르지 않는가.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계속 의문을 갖는다. 40년이란 긴 세월 탓인가.

 

“그 소슬바람이 휘몰아치던 시절의 일들은 망각의 저편에 꼭 감춰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젊은 시절에 자기의 절박한 상황 때문에 회사에서 잘나가는 점잖은 남자를 이용한 것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몸’의 미끼를 던져주고, 거액의 돈을 챙긴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회사의 돈을 손대고, 가정도 깨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밀회로 말미암아 그의 와이프도 병들어 죽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개인의 삶으로 볼 때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야에코는 편지를 ‘허구’라고 몰아세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중적이거나 냉혹한 성격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얼까. 상상하기도 싫은 나의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이기에, 세월 속에 영원히 침몰시켰을까. 

 

인간에겐 과거의 삶 속에서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 자기 의도와는 반대로 계속 반복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자기의 행위를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르게 ‘기억’이 조작되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한다. 

아마 이 소설 속 여주인공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방어 행위일 것이다. 

 

작가 우노 지요의 이 소설의 마지막 처리가 인상적이다. 유키코는 편지 내용에서 며칠 안으로 30만 엔짜리 차용증을 갖은 정원사를 그녀에게 보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정원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남자’가 세상을 뜬 것일까. 아니면, 편지는 보냈지만, 행동으로 옮기고 싶진 않았던 것일까. 작가는 결론을 내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에 모든 것을 맡긴다.

 

     ▲한상훈 문학 평론가            © 포스트24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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