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8)

국화 이미지⓵ .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0/09/01 [08:37]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8)

국화 이미지⓵ .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0/09/01 [08:37]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8)
                                                                           -국화⓵


                                                                                              한 상 훈(문학평론가)

 

고려시대부터 구전되어온 노래 「동동」을 보면, “9월 9일 중양절에 약이라고 먹는 황국화/ 꽃이 집안으로 드니, 계절이 깊어가는구나”라는 시행이 있다. 이처럼 우리의 풍속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국화’는 오래 전부터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세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장미’라면, 50대 이후의 세대에서는 ‘국화’라 한다. 어떤 점이 중년 이후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꽃에 많은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일까. 비단 선비의 고고한 품격을 지닌 우아한 미의식이나 은은한 향기를 지닌 것만으론 그 이유가 충분치 않다.

현대인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서정주 시인의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국화 옆에서」)나 김종길 시인의 “아직 늦더위가 한창인데도/ 벌써 꽃망울을 차례로 맺어/ 한송이, 두송이 피기 시작하질 않는가!”(「국화 이야기」)처럼 누추하고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아름다운 자태를 빛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얀 국화’는 “이승의 경계를 가로질러/ 1억 광년 바깥으로 떠난 사람들/ 만 미터 고도에 올라와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흰 국화꽃 한송이를 창밖으로 던진다” (김종해, 「흰 국화꽃 한송이」)와 같이 가신 분에 대한 슬픔이나 경의의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근배 시인은 고인이 되신 서정주의 고향인 ‘질마재’(전북 고창)에 가서 그 분의 산소 주변에 수많은 ‘국화’ 송이가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보고 “오늘 세계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서/ 한 송이씩 바치고도 넉넉히 남을/ 국화향기가 이 나라의 가을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것을/ 질마재에 가서 나는 보았다.”(「국화꽃 질마재」)고 노래하면서 감격해한다. 

이홍섭 시인은 「일반4호실」에서 “신발들도 기대어 졸고 있는데/ 특실로 가는 문상객이 그마저 어깃장을 놓는다// 성근 국화처럼/ 벽에 기대어 있는 젊은 아낙과, 문 뒤에 숨어/ 입구까지 덮쳐오는 긴 터널을 바라보고 있는 앳된 소녀//삼일장도 너무 긴// 일반4호실”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의 모습을 ‘국화’로 빗대고 있다. 이와 같이 국화는 옛 선비나 현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에게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꽃이다.

이번엔 ‘장미 이미지 2편’(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7)에서 주요 텍스트로 감상한 이시다 이라의 단편 「11월의 꽃망울」에 이어, 또 한 편의 일본소설을 탐색해 보려고 한다. 바로 하야시 후미코(1903~1951)의 단편 「철 늦은 국화」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후소설로, 늙은 기생과 연하의 제대군인 이야기다.
 
이 소설은 특별하다.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들여다봐도 ‘국화’에 대한 꽃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제목에 왜 들어가 있을까. 독자들은 뒤늦게 56세의 기생 ‘긴’이 바로 '철늦은 국화'로 비유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늙은 기생 긴과 옛 애인 다베와의 재회하는 과정 속에서 빚어지는 복잡한 인간의 심리가, 이 글의 중심 서사로 진행된다.

“1년만이군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갑작스럽게 다베에게 전화가 왔고, 기생 긴은 그를 만나기까지 2시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었다. 
긴은 1년 전 다베와 헤어지던 때보다 더 젊어 보여야한다고 생각한다. 56세의 기생 긴은 자신이 늙어 보이는 것은 인생의 패배라고 여긴다. 욕조에도 들어갔다 나왔다하고, 거울 앞에 서서 얼음을 가재에 싸서 골고루 맛사지도 했다. 옛날에는 그림엽서에까지 실렸던 곱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금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던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싫증이 났다. “탄력 있고 풍성했던 다리에는 가는 모세혈관이 드러나 있었다.” 아직 남자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인생의 위안이라고 생각되었다.

작가는 긴에 대한 인물 묘사와 내면 심리에 치중한다. “심한 전쟁의 소용돌이까지 겪고 보니 남자 없는 생활의 공허함에 의지할 데 없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여성적 본능을 여류작가답게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긴은 지금까지 양장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산뜻하고 야들야들한 비단 옷깃에 여린 남빛으로 염색한 겹옷”에 가슴은 풍만하게, 허리는 가늘게, 배는 허리띠 밑에 매는 속띠로 바싹 조이는 등 옷매무새를 스스로 연출할 줄 아는 기생이었다.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반드시 “차가운 정종을 다섯 잔 정도” 마신다. 취기가 달아오르면 눈 밑이 붉게 물들고, 커다란 눈이 촉촉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 나이의 여자들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긴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여자’임을 잊고 싶지 않았다. 19살부터 기생을 시작한 긴은, 30여년이 넘는 세월 속에,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려 본다. 가슴도 아려 오고, 이별의 추억 때문에 눈물도 난다. 어린 남자 다베의 전화는 의외다. 그와 재회할 때 ‘나이’가 여자로서 허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아름답구나하는 인상이 들어야 한다고 긴은 생각한다. “긴은 돈 없는 남자는 결코 상대하지 않았다. 돈 없는 남자처럼 매력 없는 상대도 없다.” 남자들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여러 가지 선물을 들고 왔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는 일 자체가 “하나하나의 예술품을 창조해 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생’의 전성시대를 한참 넘긴 긴은 지극히 물신주의적이고 세속적 여자다. 거기에 허영이 많고, 여자로서의 순정이나 진정성은 찾아볼 길 없다. ‘철 늦은 국화’처럼 시들고 볼품 없지만, 한창 때의 아름다움을 되찾으려는 여성적 본능이, 그녀의 내적 심리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가가 늙어가는 기생의 어쩔 수 없는 삶의 초상을 집도의처럼 냉정하게 형상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가난한 삶의 환경 속에서 변질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본능적 삶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보단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전쟁의 상처가 남긴 윤리적 규범의 상실에 대한 풍속을 조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작가의 의도는 다베와 재회 속에 첨예하게 드러난다.

긴이 다베를 알게 된 것은, 3년 정도 관계 맺은 남자와 헤어지고 어느 하숙집에서 편하게 쉴 때였다. 그 당시 쉰 살에 접어든 긴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30대 후반으로 볼 만큼 젊어 보였다. 막 대학을 졸업한 다베는 육군 소위로 출정했는데, 히로시마에 주둔해 있었다. 그 시기에 긴은 히로시마에 찾아가기도 했다. 종전 이듬해 다베가 귀환해서 긴의 집에 찾아왔을 때는 “늙어 앞니마저 빠진 모습”이어서 실망을 했다. 하지만 그 후 ‘멋쟁이 신사’가 되어 나타났고 곧 결혼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1년 남짓 만나지 못한 것이다. 
  
다베가 커다란 꾸러미에 위스키와 햄, 치즈 등을 가지고 왔다. 긴은 남자에 대한 욕망은 여전했지만 그에게 예전의 청년다운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다베는 긴이 여전히 아름답다며, 자기 부인보다도 더 매력적이다고 말한다. “긴이 다베의 은제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자, 그는 불을 붙여 주었다.” 그 사이 벙어리 처녀가 술잔과 접시를 들고 왔다 나갔다. 다베는 히죽 웃으며, 괜찮은 처녀라 하고, 긴은 “그녀의 젊음이 갑자기 눈에 거슬렸다.” 작가는 서로 간에 재회의 첫 인상부터 흔들리는 두 인물의 내적 심리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이 소설이 ‘불화’로 끝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베가 출현하기 이전엔, 긴의 내적 심리에만 치중하던 작가가 다베의 등장 이후엔, 두 인물의 심리를 오가며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다베는 세상사는 일이 너무나 고달프다며, “여자란 좋겠어!”하며 긴을 부러워했다. 그는 물끄러미 ‘긴’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용돌이는 이 여자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일까. 호화롭게 장미꽃을 장식해 놓고 빙그레 웃고 있는 여자, 좋은 향기만 풍기는 여자. 순간 다베는 자기 아내가 이제 스물다섯인데도 헝클어지고 피곤한 모습이 떠올랐다. 긴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예전의 그리움이 불타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베의 표정에서 금전적인 문제로 찾아왔을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긴은 ‘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다베에 대한 애정은 뒷전으로 밀린다.

 

아니나 다를까, 다베는 40만엔 정도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긴은 돈 때문에 나를 찾아 왔느냐고 비난한다. 예전의 둘의 사랑도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섹스파트너의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다베의 얼굴은 “사각모를 썼던 시절의 싱싱함은 모두 사라지고 볼 언저리에 벌써 중년의 분위기가 감돈다.” 다베는 긴의 새침스런 태도가 너무나 얄미웠고, 우선 같이 하룻밤을 보낸 뒤 풀어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까 본 벙어리 하녀의 싱싱한 젊음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다베 역시 전쟁을 겪고난 후, 청년 시절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물신적이고 성적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은 점차 “복잡하고 피곤한 방식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벌레나 마찬가지인 늙은 여자가 아닌가!” 다베는 자기 의도대로 관철되지 않자, 순간적으로 긴을 살해하는 상상도 해본다. 아마 긴의 두 개의 장롱 속에는 50년 동안 모아 둔 기모노가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긴은 다베의 학생 때 사진을 가져왔으나, 다베는 별로 흥미 없다는 듯 마룻바닥에 던져 놓았다. 긴은 다베가 이만 가길 바라는 듯 전차 시간이 괜찮냐고 묻는다. 다베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나를 쫓아낼 것이냐고 화를 낸다. 긴은 여자들만 사는 집이고, 이웃이 신경이 쓰이니, 빨리 나가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점점 서로의 마음을 직선적으로 드러내면서, 심각한 갈등의 국면에 접어든다. 다베는 다른 남자가 늦은 시각에 오시나하면서, 웃음을 띠며 조롱을 한다. 또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이삼 일이 걸려도, 돌아갈 수 없다고 거드름을 피운다. 긴은 다베가 구질구질하게 느껴졌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단 한 푼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자존심 없는 남자가 너무나 추하게 보였다.

긴은 그를 잘 달래서 내보내려고 하지만 다베는 그녀의 그런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다베는 다시 무릎을 부들부들 떨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돈이 필요했다. 돈! 어떤 방법을 쓰든 지금 당장 5만 엔이라도 긴에게 빌리고 싶었다.” “있을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게 돈 아니겠어요? 제가 오히려 당신에게 빌리고 싶을 정도인걸요....” 

‘철 늦은 국화’인 기생 긴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옛 연인 다베와 재회를 하기 직전에는 설레임으로 들떴다. 젊음 그대로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화장을 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자태를 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추레한 다베를 만나보니 예전의 그리움도 사라지고, 더구나 돈 빌려달라는 속셈을 보이자, 냉정하게 응대한다. 다베는 그녀의 너무나 차가운 태도에 살기를 느낀다. “순간 다베는 화롯불 쏘시개를 쥐었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눈썹 주위로 몰려왔다.”

 

이 작품을 발표했던 시대적 배경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류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이 소설은 1948년에 발표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척박한 현실 속에서 지난날의 낭만은 다 사라져 버렸다. 늙은 기생에게 매달려 물질적 도움을 맹목적으로 받으려고만 하는 제대군인 다베의 비굴한 모습은 전쟁이 끼친 사회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한다. 전후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젊은 날의 ‘순정’은 없다는 작가의 사회적 인식은, 이 소설을 ‘불화’의 극단으로 치닫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물간 기생의 내면에 차갑게 자리 잡고 있는 현실감각이 이 소설의 도처에 번뜩이고 있다. 결국 다베의 살기에 불안감을 느낀 긴은 그를 더 취하게 만들어서 아무렇게나 재우고, 그 다음날 쫓아낼 생각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화로의 푸른 불꽃 위에 다베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던져 넣었다.”

 

독자들은 손창섭이나 장용학, 최인훈 등 우리의 전후세대와는 다른 빛깔을 지닌 일본 전후소설의 단면을 만나게 된다. 전쟁이 지나간 상처를 그린 점에서 양국이 동질적이지만, 동족상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의 현실과 패전의 후유증으로 허덕이는 일본의 현실이기에 그 상처의 성격이 원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늙은 기생 긴은 활짝 꽃 필 때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시들어 버리는 한 떨기 ‘국화’ 꽃잎이다. 한창 싱그럽게 꽃 피던 시기에,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철 늦은 국화’의 풍경은 더욱 초라하고, 보기 민망해진다. 세월이 지나 사라져버린 것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뿐 아니다. 다베를 사랑했던 순수했던 마음마저 혼탁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돈’이라는 ‘현실’ 앞에, 두 사람의 낭만적 ‘재회’는, ‘살기’마저 드리우는 적대감으로 막을 내린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현재 <문예운동> 연재평론, <시문학> 월평, <문학미디어> 시 계간평을 쓰고
     있으며, 월간 <시> ‘청년시인상’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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