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10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한 상 훈 문학평론가
문학은 그 시대의 산물이고 반영이듯이 1950년대는 대부분 6.25의 상처가 소설의 전면에 부각된다. 그러한 전쟁의 잔혹성이나 전후의 부조리한 현실을 조명한 손창섭, 장용학, 오상원, 하근찬 같은 작가들이 문단과 독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다. 그들을 우리는 ‘전후세대’(戰後世代)의 작가라고 부른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최인훈의 「광장」(1960)처럼 남북 분단의 이데올로기적 상처나 전후 사회의 암담한 현실을 다룬 소설이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 속에서, 전쟁의 외피를 과감히 벗어버리고, 이복남매의 사랑을 다룬 상큼한 소설이 있었다. 전쟁의 아픔을 다룬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바로 여류작가 강신재(1924~2001)의 단편 「젊은 느티나무」(1960)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한국소설사에서 제법 중요한 텍스트에 속한다.
중심 캐릭터인 18살의 여고생인 ‘나’(숙희)와 22살의 대학생인 현규는 부모의 결혼으로 한 집에 살게 된다. 둘은 아무런 혈연적 관계는 없는 이복남매 사이다. 그런데, 한 집에 살면서, 서로 간에 차츰 사랑이 깃들게 된다. 세상의 윤리적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이복남매’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요 얼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감상적인 서사 전개 과정이나 통속적 결말을 미리 예단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인물의 설정은 텔레비젼에서도 쉽게 만나게 되는 막장 드라마의 유형으로, 시청자들이 욕하면서도 즐겨 보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남녀의 사랑이나 출생의 비밀을 지닌 인물 설정의 상투적인 소재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은 못된다. 그러한 서사의 뼈대를 어떠한 관점으로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수준은 편차를 보이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가족사 소설인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장편 『압살롬, 압살롬!』도 ‘출생의 비밀’은 서사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이 소설의 중심 이야기인 서트펜 가문의 몰락 과정은 그의 딸과 전처 소생의 아들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서트펜의 아들 헨리는, 그들의 사랑을 알고 나서, 몇 년간 고민하다가, 이복 형 본과 사랑스런 여동생 쥬디의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아버지 서트펜은 생각이 다르다. 왜냐하면, 딸을 사랑하는 전처 소생의 아들 본의 가문에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의 보수적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서트펜에 의해 ‘혈통’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리하여 서트펜은 아들 헨리에게 본은 흑인의 피가 있기 때문에 네 동생인 쥬디와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결국 헨리는 다시 번민의 나날을 보내다가, 내 동생의 순수한 사랑보다 가문의 핏줄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은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본과 쥬디의 사랑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극단적 대치 상황은 화해의 국면을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쪽이 허망하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서트펜의 아들 헨리는 이복 형 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미국 남부문학을 대표하는 『압살롬, 압살롬!』은 여러 작중 인물들의 기억과 회상을 통해 서사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작가의 독특한 소설 기법 때문에, 독자들에게 대단히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이 소설의 중심 주제인 ‘핏줄’의 문제를 이처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과 사회성을 무겁게 조명하고 있는 『압살롬, 압살롬!』은 그 서사의 기본 얼개는 남녀의 출생의 비밀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젊은 캐릭터들의 ‘사랑’은 사회적 규범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는 고전이다. 그렇다면, 『압살롬, 압살롬!』처럼 ‘금지된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어느 정도 통속성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진지하게 탐색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아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이처럼 「젊은 느티나무」는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감각적 표현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첫 문장에서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는 ‘그’는 누구인가. 당연히 소설의 화자인 숙희와 사랑하게 되는 ‘현규’다. 주인공 ‘나’(숙희)는 시골의 고등학교에서 생활을 하다가 어머니의 재혼으로 서울에 올라온다. 무슈 리라고 부르는 어느 사립대학의 경제학 교수와 어머니가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되고, 거기에서 그분의 아들인 현규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현규와 ‘나’ 사이는 오누이가 된다. 하지만 숙희의 맘속에서 현규와 ‘오누이’라는 관계는, 그 자체가 ‘혐오와 공포’를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이복오빠인 현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물 두 살의 남성이고 ‘나’는 열여덟 살의 계집아이라는 것이, 둘 사이의 ‘진실’의 전부라는 생각을 한다.
숲 속을 같이 거닐면서 손을 잡고, 그에게 안기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게 되지만, 금지된 사랑의 사회적 관습 앞에, 숙희는 감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을 태운다. 이복오빠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침대 위에 엎드려서 울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외국에 나가 있는 무슈 리(계부)에게 엄마가 1년 정도 머물고 있어야 할 상황이 벌어진다.
숙희는 현규와 집안에 둘만이 있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금기시 하는 ‘사랑’을 깨뜨릴 용기가 없는 그녀는 현규와 헤어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두 사람만의 동거를 피하기 위해, 할머니가 계신 시골집으로 간다. 서울의 학교도 그만두어야 하고, 현규도 만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체념하고, 가슴앓이를 한다. 시골에 내려간 숙희는 날마다 “들장미의 덤불과 젊은 나무들의 초록이 바람을 바로 맞는 등성이”로 올라가서 아픈 마음을 달랬다.
“바람을 받으면서 앉아 있곤 하였다.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 터어키즈블루의 원피이스 자락 위에 흰 꽃잎은 찬란한 하늘 밑에서 이내 색이 바래고 초라하게 말려들었다.”
‘젊은 느티나무’와 들장미의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산에 올라가 방황과 고뇌로 얼룩진 마음을 추스렸던 숙희는, 어느 날 산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랜다.
바로, 현규였다. 그는 급한 경사로 이루어진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입을 일자로 다물고, 화를 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꽉 다문 현규의 입은 숙희가 보기에 슬퍼 보였다.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숙희는 저절로 그편으로 몸이 달려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사실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기 위해 ‘젊은 느티나무’를 붙든 것이었다.
“그래, 숙희, 그 나무를 놓지 말어. 놓지 말고 내 말을 들어.”
현규는 자기도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말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지 참담한 것이 있었다.
“숙희는 돌아와서 학교에 가야 해. 무엇이고 다 잊고 공부를 해야 해. 나도 그렇게 할 작정이니까.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 해. 헤어져서 공부해야 해. 어머니가 떠나시려면 비용도 들 테니까 집은 남 빌려주자고 말씀드렸어. 내가 갈 곳도 생각해 놓고. 숙희도 어머니 친구 댁에 가 있으면 될 거야. 그렇게 헤어져 있어야 하지만, 숙희, 우리에겐 길이 없는 것은 아니야. 내 말을 알아 들어줄까?”
현규는 시골에 내려와야만 했던 숙희의 내적 번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그는 그 나름의 해법을 갖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 해법은 무엇인가.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동안 서로 헤어져 있되, 우리의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로 정리된다. 그녀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차분하게 설득하고 있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숙희의 감성적 정서와 현규의 이성적 태도가 충돌하고 있는 장면이다.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느티나무를 잡고 서있는 숙희의 모습은 지금의 시점으로 볼 때 숙연해지기 보다는 웃음이 야기될 만큼 순정적이다.
갑작스런 현규의 출현과 함께 그의 말에 충격을 받고 가늘게 떨고 있는 숙희의 모습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연약해 보인다. 그나마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느티나무’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규는 나무를 붙잡고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그녀를 계속 바라보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때 숲속에서의 일은 우리에게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부정하고는 살아가지도 못할 게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야. 우리에겐 길이 없지 않어. 외국엘 가든지...”
사랑의 방법을 찾지 못해 도피해왔던 숙희에게 현규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숙희는 논리적이고 열정적인 그에게 눈물이 날 만큼 감동하고, 그의 사랑의 해법에 공감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현규를 사랑해도 된다는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와 삶의 위로를 받는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서울 집에서 둘이 남는 것은 숙희뿐만 아니라 현규 역시 난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규는 헤어져 있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계속되어야한다는 시각으로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 점이 ‘금지된 사랑’ 앞에서 순진하게 좌절하고 있는 숙희와 시각이 달랐던 것.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이러한 현규의 말에, 그대로 순응하는 그녀는 지극히 순종적이며 소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한 여성 캐릭터의 모습은 작가 강신재가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의 전형을 그린 것이어서, 서사를 단조롭게 끝내는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발표하던 1960년의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생각해 볼 때, 이복남매의 사랑이라는 ‘사회적 금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를 찾아가고 있는 과정 그 자체가 작가의 과감한 시도인 것이다.
작가는 젊은 남녀의 순수한 사랑이 깊은 나락이나 파멸에 빠지기 직전,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서사의 줄기를 잡아 나간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강신재 작가는 제목의 ‘젊은 느티나무’처럼 싱그럽고 순수한 사랑의 결말로 소설을 밝고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느티나무’는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공간이면서 증인이 되기도 하는 중요한 문학적 장치로 설정되어 있다. ‘젊은 느티나무’란 금지된 사랑의 사회적 관습에 좌절하지 않는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 또는 건강한 생명력, 믿음 등을 포괄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캐릭터의 섬세한 내적 심리와 감각적 표현, 암시 등의 기법을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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