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시평 (45) 변혜지 시인개인성과 내면성으로 나타나는 환상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나는 법』, 문학과사상사, 2023.)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시평 (45) 변혜지 시인
-개인성과 내면성으로 나타나는 환상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나는 법』, 문학과사상사, 2023.)
가끔 신문을 읽다 보면, 타인들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종종 봤다고 하는 글을 읽을 때가 있다. 이러한 타인의 환상 경험은 3차원이든 4차원이든 차원의 경계를 해체해 버린다. 환상이란 인간의 인지능력 그 이상의 초월적인 것이 현실 세계에 들어와서 인간 의식을 순간적으로 파기하거나 낯설게 하는 경이이다. 자연적인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 인간은 머뭇거리다 자기 눈을 통해 환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에서 환상성이란 시적 주체가 망설이다 경이를 경험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어의 표현에서 환상성이 되려면 존재론적 지형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환상성은 일직선의 시간성이 파괴되어 현실과 다른 차원의 세계가 서로 개방되어야 하고, 또한 시적 주체가 세계와 차단된 채 한 곳에 몰입하는 상황을 통해 공포나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츠베탕 토도로프는 문학이 독자들에게 작중 세계를 살아있는 인간세계처럼 생각하도록 하고, 사건들에 관해서도 자연적인 해석과 초자연적인 설명 사이에서 망설임을 가져야 환상이라고 말한다.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2022, p.56.) 결국 토도로프의 말은 독자가 비정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어떤 존재를 보고 ‘공포’를 경험하고 ‘음산한 분위기’ 앞에 머뭇거려야 환상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궁금한 점은 시인들이 왜 환상시를 쓰고자 하는 충동을 느낄까? 그들은 환상시를 통해 현실 질서에 대한 위반을 드러내고 싶고, 권태나 시대 상황의 탈출구로 이용하고 싶으며, 수혈 없는 전통문학을 쇄신하고자 하는 욕구의 표출이고, 또는 신과의 교류를 위해 영원의 세계에 들고자 하는 희구의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변혜지 시인의『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에서 나타나는 환상시는 개인성과 내면성의 특성을 보인다. 개인성은, 시에서 주체가 공포와 불안한 상황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타자와의 소통 불가능성은 시적 주체가 사회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소외와 고립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주체는 소통 불가능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하게 된다. 이럴 때 개인성은 가끔 환상성으로 나타난다.
내면성은, 시적 주체가 체계적인 질서와 지배 이데올로기에서도 이탈되었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필요성과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 시적 주체의 경험은 이 세계가 자신에게 모든 걸 보호해 주는 게 아니라 소외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세계와의 관계를 인식할 때 경험하는 불안과 자아분열 양상은 파괴 심리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먼저 개인성에서 시적 주체는 사물의 세계로부터 소외와 억압을 경험하면서 그 세계로부터 이탈하기 위해 자신과 소통할 매개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위악적인 행위를 통해 환상세계를 경험을 하게 된다. (「프라스틱 아일랜드」, 「팩맨」,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여섯 번째 날」 등)
그 속에서 내가 잠드는 꿈을 꾸었다
밧줄로 사지를 묶어두고 사람들이 나를 돌본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아이들이 입속에 빵을 넣어주다가 미끄러진다
나는 삼백 인분의 요리를 해치우고 사지가 묶인 채 잠이 든다
……<중략>……
그러나 잠들어 있는 동안 도끼를 든 네가 찾아와 도시를 모두 부숴놓았고
푸른 도시로 가자고 손을 내밀며 네가 말해서 다시 나는 눈을 감았다 -「레고 피플」 일부분
이 시에서 환상성은 인간이 사물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역전 현상을 보인다. 유아기의 시적 주체는 종일 레고놀이를 한다. 이러한 주체의 놀이를 통해서 보면, 유아 주체의 경험이란 세계와는 거의 없는 것이어서 소통 불능상태가 된다. 예컨대 유아 주체는 레고 피플에 의해 “밧줄로 사지”가 묶이고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주체 자신도 레고 피플에 대해 기괴한 반항을 한다. 제 “입안에 빵을 쑤셔 넣거나”, “삼백 인분의 요리를 해치운 후 사지가 묶인 채 잠이 든다”라고 한다.
이런 위악적인 환상은 「팩맨」에서도 나타나는데, 성인 주체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 나귀가 풀쑥 쓰러지고, 바람과 어둠과 모든 나무가 그를 잊어도 또 걷고 있다”라고 한다. 위의 시행들을 통해서 보면, 시적 주체의 행위는 세계를 향해 반항하고, 또한 세계가 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매개로 꿈에서 위악적인 행위를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환상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보통의 아이들은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책을 간구하는 것과 달리, 유아 주체는 “푸른 도시로 가자고 손을 내밀지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레고의 세계, 즉 그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지만 그대로 꿈 속에 있고자 한다. 이처럼 변혜지 시인의 환상시에서 개인성은 사물과의 화합보다는 또다른 내가 사물을 파괴하면서 그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위악적 행위로 표현된다.
내면성의 환상시에서 시적 주체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질서로부터 이탈되어 불안해하거나 사고 위반을 드러낸다. 주체가 사회와의 관계를 의식할 때 경험되는 분열감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에 고립되어 사회와 조화로운 관계를 양립할 수 없다. 주체가 사회와 갈등 관계에 놓여 있다고 인식되면 자신의 체험 세계는 사고의 위반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고립된 주체가 사회 질서를 따르지 않고 제 내면으로 도피한다는 점에서 환상 세계로 표현된다. 결국 환상시에서의 내면성은 ‘의식적인(현실) 나’와 ‘무의식적인(꿈속) 나’라는 두 개의 자아분열 양상을 띠는데, 각기 다른 ‘나’는 꿈과 현실에서 등을 보이거나 모르는 상태로 분리되어 있다.
부엌장 위에 놓여 있던 먼지 쌓인 그라목손이 사라졌 을 때 나는 분명 최소화 버튼이 눌렀던 것이다. 아니 분 명 최대화되어서 님비곰비 곰비님비 천방지방 지방천 방……이게 나야?
나는 양치 컵 속에 넘쳐흐르는 지렁이들을 모아 온다 일회용 젓가락을 손에 쥐고 엄마는 입이 축축하였다. 씹 지도 않고 저걸 씹지도 않고 병아리들이 삼키는 동안
왜냐하면 엄마가 나를 깨웠기 때문이다.
…… <중략>……
유리병에 개미를 모은다 길에서 고양이를 줍는다 쥐 며느리를 동글동글 말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깨진 채 집통 속의 잠자리들이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날아올라서 나는 산산이 찢어지고도 멀쩡하였다. 이것도 아니야?
그럼 내 손을 잡고 있던 나의 쌍둥이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내가 되는 꿈」 일부분
이 시에서 주체는 현실의 ‘나’와 꿈 속 두 개 ‘나’로 나누어져 자아분열된다. 첫 번째 ‘나’는 꿈속에서 그라목손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정신을 잃는다. 하늘 방향이 어디인지, 땅 방향이 어디인지 모르고 정신없이 날뛴다. 그라목손은 죽음의 농약인데, 그 농약병이 없어진 것을 안 시적 주체는 엄마의 죽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엄마의 입이 축축”하다는 것으로 봐서 죽음이 아니라 지렁이를 잡기 위해 땅에 농약을 쳤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농약을 먹은 지렁이를 병아리들이 씹지도 않고 삼킨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적 주체는 독자들에게 병아리들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이 시에서 소재로 채택된 지렁이, 병아리 그리고 풀 등은 그라목손을 먹으면 죽는 존재다. 그라목손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생물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농약병의 실종은 그에게 사고 위반을 하게 한다. 두 번째 꿈속에서 시적 주체인 ‘나’는 “유리병에 개미를 모으고”, “길에서 고양이를 줍고”,“쥐며느리를 동글동글 말아 식탁 위에 올려놓는” 행위를 한다. 또한 “채집통에 잠자리들이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날아” 오르게 한다. 꿈속 ‘나’의 행위는 정상적인 사고를 넘어 산산이 찢어지는 비정상적인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꿈속에서 두 개의 ‘나’는 서로 연결된 것과 달리 서로 단절되어 있다. 혼자서 고립된 채 ‘모으고’, ‘줍고’, ‘올려놓는’ 행위는 풀과 동물을 죽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고 위반을 함으로써 세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양립할 수 없게 된다. 동시에 그는 시에서 사회적 불안과 고립감을 드러냄으로써 사회에 대한 자기 길을 차단한 채 위악적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환상시에서 내면성은 당대 이슈인 생태계를 파괴하는 산업화의 문제를 비판함으로써 시적 주체의 환상 세계의 체험이 불안과 자아분열 그리고 사고 위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에 꾼 꿈」, 「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희박하게 끓어오르는 물」, 「쌍둥이」, 「내가 태어나는 꿈」, 「언더독」 등)
이제까지 환상시에서 나타나는 개인성과 내면성을 살펴보았다. 이 특성 이외에도 환상시는 여러 겹으로 싸여 있다. 신문의 특성상 환상의 겹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루지 못한 환상성에는 의식이 먼저 나타나고 환상이 뒤에 나타나는 순차적 환상성이 있고, 환상이 먼저 나타나고 뒤에 의식이 드러나는 역전 환상성도 있다. 그런가 하면 환상 속의 환상을 보여주는 중첩 환상성과 신의 거절을 반대하고 영원한 세계로의 회귀도 반대하는 그러한 환상성도 있다. 다양한 환상성은 사회에 대한 불안과 자아분열 그리고 사고 위반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시인의 환상 체험이 단절성에 기초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불확실한 감정은 비단 시인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조차도 내 안의 나를 몰라 고립시키는 일이 생긴다. 변혜지 시인의 환상시는 중층 감정을 통해 고립된 개인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신에 대한 말씀처럼 그녀의 시집 속의 환상시들이 독자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길 바란다.
〚변혜지 시인 약력〛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권영옥 시인, 문학평론가 약력〛 □아주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2003『시경』작품활동 시작, 2018『문학과사람』평론 연재 □비평집『한국현대시와 타자윤리 탐구』,『구상 시의 타자윤리 연구』, 평론집『비시간성에 의한 그림자 시학』 □시집『청빛 환상』, 『계란에 그린 삽화』, 『모르는 영역』 □전)상지대, 아주대 외래교수, 문예비평지『창』편집장,《포스트24》시평 연재 중 □<두레문학상> 수상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오피니언/ 문학/ 예술/인터뷰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