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넓은 유월이 가지를 밀며 들판을 건너가는 저녁, 『모르는 영역』 시집을 출간한 권영옥 시인을 만났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를 쓰는 것이 시다. 모르는 영역을 따라가다 보면 낯설고 새로운 언어가 나타나고 구조가 보인다. 대야에 거품을 풀어놓고 엄니를 그리워하는 수국 피는 계절이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리운 것들의 질감은 어린왕자에게 주어버린 노을에 관한 전설 같은 것, 권영옥 시인의 모르는 영역이 세상 모두의 영역이 되길 바란다.
Q: 『모르는 영역』 시집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세요 A: 먼저, 시집 제목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대부분 시인은 시집 제목을 시 제목에서 발췌해 오곤 합니다. 제 경우에는 시집 제목부터 쓰고 그 제목을 한 시의 제목으로 썼습니다. 시집 제목을 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습니다. 검붉고 탱탱하게 보이는 사과가 사람의 입맛을 자극하듯, 시집 제목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빙하기의 기록』, 『겨울 색채』를 놓고 고민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손에 『모르는 영역』을 들고 있었고, 그 제목이 한 영상으로 지나갔습니다. 너무나 선명한 나머지 바로 일어나 그것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해가 며칠 째 북쪽에 머문다 아이의 눈 밑이 검다 낮이 숨긴 밤의 이야기는 소외의 반복이다. 벽 뒤에 가려진 불의 흑막을 눈치챌 것, 기분 나쁜 꿈은 꼭 들어맞는다는 안주인의 말이 생각나는데, 너는 어제처럼 보드피 아* 절정에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 제실의 촛대를 부수고 있다. 채전은 나비에게 경계 너머에만 있습니다 생전처럼 마음 급한 나비는 안구에 흰구름이 끼고, 자면서도 웅얼웅얼 엄마인지 단박에 알아버렸습니다 어미의 뿌리를 딛고 선 나도 파꽃여자입니다
A: 고독은 인간 마음에 나타나는 견해나 생각 덩어리인 관념이지요. 어떤 인간이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존재합니다. 물론 나무, 동물, 꽃 이런 사물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고,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함께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나의 참여이고, 서로 교환하는 관계이지요. 본질적으로 유한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자는 세상 모든 관계에서 나 이외의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 톰 행크스처럼 고독은 인간과의 격리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나눌 사람들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고독은 나 혼자만의 존재,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 때문에 자신에게 고립되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의 고독’이라고 하지요. 나 역시 존재의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마음은 고독을 버무리며 산다 고독의 깃이 하늘로 솟구치면
고통의 지층학 권영옥 시집 『모르는 영역』 읽기
I.해설 소크라테스와 (그의 손자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떤 선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함’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악이 ‘윤리’의 이름을 행해졌던가. 궁극적 선을 지향하는 예술이 때로 윤리와 싸우는 것은, 모든 윤리와 도덕이 항상 선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함’이란 전유專有와 규정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때 온전해진다. 선의 개념을 정의하는 순간,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다른 모든 것은 선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혹은 예술적 선이란, 규정이 아니라 ‘응시’에서 생긴다. 전유를 통한 강요가 아니라, 자신과 타자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상처 줌이 아니라 ‘상처받기 쉬움vulnerability’의 상태에 있을 때, 예술은 상처를 범주화하지 않으며 상처와 더불어 운다. 이글턴T. Eagleton이 레비나스E. Levinas의 윤리학을 “당당한 성취의 윤리가 아니라 무너짐 그리고 상처받음의 윤리”라 정의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시는 아픔과 결핍을 응시하며, 그것과 함께 눈물 흘리고, 그것을 기록한다. 이런 점에서 권영옥의 이 시집은 고통의 다양한 지층에 대한 탐구이다. 고통은 오랜 역사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권영옥은 그것을 뚫고 들어가 은유와 환유를 동원하여 고통의 지층학을 쓴다. 냉동의 시간을 견뎠던 나는 줄기에도 층계가 생겼다 바람의 무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새벽 굴착기에 들이 받쳐 퇴적층이 쿵 떨어진다 그 속에 들어있던 삼엽충이 나동그라지고 빙하기의 끝줄을 잡은 혈관에서도 벌레가 실눈을 뜬다
어떠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들 잘하지 못하는데), 권영옥은 어떤 진술을 할 때도 ‘시’의 형식으로 한다. 가령 랑시에르J. Rancière에게 있어서 “문학의 정치”란,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문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정치적 실천일 수는 있으나 적어도 ‘문학의 정치’는 아니다. 문학은 정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 오로지 문학의 형식으로 한다. 권영옥 시인은 고통의 지층을 탐구할 때도 기술記述 description이나 설명이 아니라, 은유와 환유로 한다. “고생대 고사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비극과 운명의 “굴착기”는 인류의 먼 과거로부터 “어린 순”과 “벌레”의 삶을 무참히 훼손해왔다. 생명체들은 “자신도 모르는 검은 무늬들”(죽음)의 공포 속에 언제든지, 갑자기 노출될 수 있다. “서로의 연대기도 모른 채, 부둥켜안고” 우는 것이, 슬픔의 몸(신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이런 “순교의 가시관”이 모든 피조물인 생명체들의 미래(“내일”)이다.
고원에 이르자 수박이 커가는 것 같이 새가
새가 “부리로 수박을 찍은 후 땅 깊숙이 들어”가는 행위야말로 고고학 혹은 지층학의 기술技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깊은 지층 속에서 새가 발견하는 것은 “돌과 검은 유전 사이”의 “굶주린 거인”이다. 지층의 먼 땅속에 숨어 있는 죽음의 폭력은, 바로 지금, 여기의 수술실에서 “금속성”으로 “돌진”해온다. 땅속에서 “범람하는” “붉은 혀와 검은 그림자”는 시간의 지층을 뚫고 먼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 움직인다. 이 끝없는 죽음의 동선動線이, 지구에 “상처 난 수박”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구본을” 오래 들여다본 시적 화자의 결론이다.
II.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새가 “부리로 수박을 찍은 후 땅 깊숙이 들어”가는 행위야말로 고고학 혹은 지층학의 기술技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깊은 지층 속에서 새가 발견하는 것은 “돌과 검은 유전 사이”의 “굶주린 거인”이다. 지층의 먼 땅속에 숨어 있는 죽음의 폭력은, 바로 지금, 여기의 수술실에서 “금속성”으로 “돌진”해온다. 땅속에서 “범람하는” “붉은 혀와 검은 그림자”는 시간의 지층을 뚫고 먼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 움직인다. 이 끝없는 죽음의 동선動線이, 지구에 “상처 난 수박”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구본을” 오래 들여다본 시적 화자의 결론이다.
II.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권영옥에게 어머니는 슬픔과 고통, 그리움의 기표이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곳마다 거의 예외 없이 “달”이 뜬다. 달은 완성된 자궁과 풍요와 영혼의 젖줄 같은 것이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에서 “모르는 영역”은 (현재는) 비존재로 존재하는 어머니의 영역이라 보아도 좋다. 그곳은 어디인지 모르지만 “달맞이꽃 향기”가 나고, 달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는 곳이다. 달은 죽음의 중력과는 반대 방향으로 화자를 둥둥 띄운다. 마치 “무중력” 속에서처럼 화자는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 경계 너머의 “모르는 영역”에 있는 어머니에게 화자는 “엄마 안녕!”이라고 말을 건다.
숲을 지나갈 때 운구차에 실린 어매는 말을 쏟아냈니더
일반적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어머니는 끝도 없이 말을 쏟아낸다. 실제로는 어머니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의 화자가 죽은 어머니의 하고 싶은 말을 끊임없이 대신 “복제”하는 것이다. 화자에게 어머니는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까지 찾기 위해 “가슴 속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뒤”져야 하는 존재이다. 어머니의 사라짐과 동시에 어머니의 모든 언어도 사라진다. 화자는 어머니의 말을 계속 대신 함(“복제”)으로써 어머니와의 이별을 부정하거나 지연시킨다. 화자는 마치 상여 소리의 후렴처럼 “~니더, ~니더”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채전은 나비에게 경계 너머에만 있습니다
시인은 어머니를 계속 소환한다. “경계 너머”의 어머니가 “나비”의 모습으로 경계를 넘어온다. 비존재가 존재로 현현할 때 ‘형태 변용metamorphosis’이 일어난다. 언어의 형태 변용은 은유이다. 화자가 나비를 “엄마인지 단박에 알아버”릴 때, 메타포는 탈코드화decoding된다.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나비가 된다. 이것이 경계 너머의 존재를 현세로 불러오는 시인의 방식이다.
먹구름이 내려앉은 수돗가
화자는 “푸른 비눗방울”로 거품을 풀어놓는다. 거품은 중력을 버리고(혹은 거부하고) “하늘역”으로 상승하는 것의 시니피앙이다. 피조물은 몸의 은유를 거치지 않고 천상天上으로 오를 수 없다. 몸이 몸을 버리고 비눗방울로 형태 변용할 때 은유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이 아닌 곳에 있는 비존재를 만나는 길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천상의 존재가 은유를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 아니면 지상의 존재가 은유를 정거장을 거쳐 “하늘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권영옥 시인은 이렇게 메타포의 왕복운동을 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III.
연기가 도시를 층층이 에워싼다
시리아 내전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죽음의 “기밀 역사”에 시선을 던진다. “가난한 드라큘라”의 먹이는 살아있는 생명들이다 그것은 “핏물 빠진 목”에도 사정없이 이빨을 꽂는다. 생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이런 공간을 시 인은 “그믐달의 잔영”이라 부른다. 보름달이 생명으로 충 만한 자궁의 메타포라면, “그믐달”은 생명력을 모두 잃은, 죽은 에너지의 은유이다. 권영옥 시인은 이 작품 외에도 매향리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매화도 르포」, 「화산 봉우리 를 넘어서―모코하람의 아기 생산 공장」 같은 작품들을 통 해 고통의 다양한 지층을 응시한다. 권영옥 시인이 바라보 는 고통의 땅속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레퀴엠」, 「겨울 음 화」, 「암스트롱」 같은 작품들은 죽음의 파편들로 분분紛紛하다.
이승의 살이 빠져나간 목도리처럼
이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이 작품에서도 시인 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소환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꽃조 차 차가운 성에가 되어 마음을 찌르는 고통 속에서 권영옥 의 시들이 발아한다. 그러나 권영옥 시인의 진정한 잠재성 은 이런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은유화하고 환유화하 는 그의 능력에 있다. 시집의 후반부에 실린 「사과를 들고 서」나 「금빛 설화」 같은 작품들은 예술가가 현실과 어떻게 거리를 갖고, 그것을 세계의 보편적 서사 혹은 신화로 전 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현실과의 거리를 설정하 고 현실의 특수성을 견뎌내며 그것을 보편적 서사로 치환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훌륭한 예술이 가지고 있는 ‘숭고미sublimity’이다. 회 회전한 무용수 얼굴, 날개에 왕관 무늬가 찍혔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빠져나왔습니다 요즘 은빛 감정이 수시로 찾아와 불빛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엄마가 늘 빛을 비추며 맞이하던 바위로 갑니다 뻐근한 불행을 내려놓기도 전 눈을 감거나 그리기만 해도 가슴이 환해집니다 서 있습니다. 저는 사과를 들고 갑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생 사이의 복잡한 길항拮抗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채색함으로써 (권영옥의 시들을) ‘세부의 감옥prison of details’에서 구해낸다. 시는 그 모든 디테일을 다 그릴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시는 디테일의 우물에서 시작되지만, 그곳에 갇혀있지 않고 ‘보편의 서사’라는 둥지 안에 세부 사항들을 품는다. 그때 보편의 서사는 무수한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 Blake의 ‘신화 시’들에서 이런 시도를 만난다. 이 작품에서 물의 신 “무트”와 “왕관매미”는 (죽음과 반대되는) 생명의 거대한 상징으로 읽어도 된다. 그것은 죽음과 싸우며 생명의 “활옷”을 입고 (어머니의) “부재에 비틀대던” 화자를 구한다. 그런데 엄마의 재촉을 따라 다리 위의 왕관매미에게 갈 때도, 화자는 왜 “사과”를 들고 갈까. 영원한 구원의 다리를 건널 때에도 인간은 “사과”를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욕망과 금기의 상징이며, 삶-죽음 사이의 길항에서 인간을 갈등하게 한다. 권영옥 시인은 이렇게 신화적 서사 속에서도 손쉬운 해답 찾기로 넘어가지 않는다. 신화는 세계의 거대한 지도이지만, 모든 지도가 수월한 길을 주지는 않는다. 삶의 대로에 항상 놓여있는 장애물을 잊지 않고 건드릴 때 시인의 웅숭깊은 사유가 드러난다.
화첩에서 크림트의 활옷을 보는 순간 정원의 생명나무며
이 작품도 생명과 죽음의 서사narrative를 그림처럼 화려한 “금빛 설화”로 그려내고 있다. “생명나무”와 “활옷”, 그리고 기화된 영혼인 “나비”가 함께 우려내는 풍경은, 슬프고, 장엄하며, 아름답다. 이 시집은 이렇게 고통(죽음)의 지층학을 총론에서 각론으로 또 신화적 서사로 왕복 운동 하며 그려낸다. 그리고 모든 행로에 은유가 빠지지 않는 다. 그러므로 권영옥은 은유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시인이다.
▲권영옥 문학평론가 [권영옥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 이메일 : dlagkwnd@hanmail.net.
【편집=이영자 기자】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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