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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영역』 권영옥 시인을 만나다.

연명지 기자 | 기사입력 2021/06/08 [08:34]

『모르는 영역』 권영옥 시인을 만나다.

연명지 기자 | 입력 : 2021/06/08 [08:34]

                      

  © 포스트24

 

▶잎 넓은 유월이 가지를 밀며 들판을 건너가는 저녁, 『모르는 영역』 시집을 출간한 권영옥 시인을 만났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를 쓰는 것이 시다. 모르는 영역을 따라가다 보면 낯설고 새로운 언어가 나타나고 구조가 보인다. 대야에 거품을 풀어놓고 엄니를 그리워하는 수국 피는 계절이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리운 것들의 질감은 어린왕자에게 주어버린 노을에 관한 전설 같은 것, 권영옥 시인의 모르는 영역이 세상 모두의 영역이 되길 바란다.  

            

Q: 『모르는 영역』 시집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세요         

A: 먼저, 시집 제목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대부분 시인은 시집 제목을 시 제목에서 발췌해 오곤 합니다. 제 경우에는 시집 제목부터 쓰고 그 제목을 한 시의 제목으로 썼습니다. 시집 제목을 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습니다. 검붉고 탱탱하게 보이는 사과가 사람의 입맛을 자극하듯, 시집 제목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빙하기의 기록』, 『겨울 색채』를 놓고 고민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손에 『모르는 영역』을 들고 있었고, 그 제목이 한 영상으로 지나갔습니다. 너무나 선명한 나머지 바로 일어나 그것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모르는 영역』은 제 세 번째 시집입니다. 이 시집에서 제가 평소에 쓰고 싶었던 내용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를 쓸 때 주제를 생각해서 쓴 것은 아니지만 쓰고 나니까 주제가 크게 두 가지로 모이더군요.
 첫 번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문화와 전쟁에 피해를 본 타자들의 군상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현대사회는 물질문화가 정신문화를 앞질러 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배태한 물질 만능이 현대인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윤택하게도 합니다. 어쩌면 그 윤택함과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은 늘 전쟁을 일으키고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늘 편리함의 이면에 존재합니다. 물질의 발달이 가져오는 문제는 인간의 삶을 파괴합니다. 장용학 소설가가 말하더군요. “문제는 문제로 삼으면 문제가 된다”라고요. 뒤집어 말하면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이죠.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시인들이죠. 널리 알려진 김수영 시인이 그 예입니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물질의 발달이 인간에게 주는 속도 문제를 시에 제기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한 시대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 시에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고 해서 제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시인이라면 현대문명의 폐단 정도는 시집 한 권 안에 한 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의 뇌를 건드리는 가상병이 고택에도 스며들었다 망초꽃 목이 자주 부러졌다 목백일홍
   에 기대어 오월의 공중 풀꽃을 바라보는 망초꽃

   해가 며칠 째 북쪽에 머문다

   아이의 눈 밑이 검다 낮이 숨긴 밤의 이야기는 소외의 반복이다. 벽 뒤에 가려진 불의 흑막을      

   눈치챌 것, 기분 나쁜 꿈은 꼭 들어맞는다는 안주인의 말이 생각나는데, 너는 어제처럼 보드피           

   아* 절정에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 제실의 촛대를 부수고 있다.
   혁명가가 지도 한 장 없이 은하 제독을 찾아가는 무지처럼 거머쥔 손을 피해 건너편
       
   목백일홍이 몇 며칠 울다가 커브를 틀고, 기댈 곳 없는 망초꽃도 양극성장애를 앓는다 오랫
   동안 한 방향으로 바람 맞은 고택은 북쪽 길을 향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스타워즈 이후」 전문 
      
위의 시는 물질문명이 배태한 사이버 시대, 게임에 탐닉한 청년이 자신의 본분과 본성을 잃은 채 폭력을 행사하고 이기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가 어머니와 관계되는 고향이야기입니다. 제가 시집 세 권을 출간하면서 이번처럼 어머니를 시 소재로 많이 채택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어머니는 92세로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집안의 막내로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온갖 사랑이란 사랑은 다 받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죄송스러운 마음이 어머니에 관한 시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어머니는 제 심상 속에 늘 ‘휜 수건’을 쓰고 밭일을 하는 장면으로 비치곤 합니다. 사과 과수원에서 일할 때나 고추밭, 수박밭에 풀을 뽑을 때, 깨와 콩을 떨 때도 흰 수건을 쓰셨습니다. 더욱이 겨울 농한기에 삼(안동포)을 삼고, 삼베를 짤 때도 흰 수건을 쓰셨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제 무의식에서 나온 ‘흰 수건’은 제 어머니의 은유이자, 어머니의 개인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채전은 나비에게 경계 너머에만 있습니다
      나비가 울타리를 넘어와 파밭을 돌더니
      어제처럼 손을 비빕니다
      나비 손이 파꽃 위에 봉긋이 모아질 때
      장맛비가 날아와 파꽃을 텁니다

      생전처럼 마음 급한 나비는
      둔덕을 돋우느라 손톱 밑이 새까맣습니다
      눈을 떴다 감았다
      잠깐의 쪽잠도 힘이 듭니다
 
      왜 손바닥만 비빌까
      나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안구에 흰구름이 끼고, 자면서도 웅얼웅얼
      파꽃이 비에 엎어질까
      파 씨가 뿌리내리지 못할까

      엄마인지 단박에 알아버렸습니다

      어미의 뿌리를 딛고 선 나도 파꽃여자입니다
                                            -「흰 수건」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밭일할 때는 쓰는 수건의 흰색은 어머니의 고된 한의 상징이고, 범박하게 보면 우리 민족의 모성성을 띠는 지모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채소밭에 “나비 손이 파꽃에 봉긋이 모아”집니다. ‘나비’는 어머니 혼령의 은유라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존재입니다. 이때 비가 내립니다. 나비가 비를 맞는다는 것은 예전의 고된 노동 상태를 소환하는 것입니다. “파꽃이 비에 엎어질까/파 씨가 뿌리내리지 못할까” 이런 전후 사정을 통해 시인은 나비가 “엄마인지 단박에 알아버립니다” 저승의 혼령을 현실의 나비로, 그 나비가 엄마의 존재로 새롭게 규정된다는 점에서 이 시행은 탈 코트화가 일어납니다.


이외에도 『모르는 영역』은 ‘무의식의 영역’과 ‘사회적 상황’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큰 주제로 묶기에는 긴 흐름을 유지하지 않아서, 범박하게 두 가지 주제로 잡아 봤습니다. 과학 기술주의와 물질문명이 우리의 삶을 가속화하기는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를 한 시인이 대안이나 해결책을 내놓기에는 어불성설입니다. 제 시적 화자의 경우 이런 문제의식을 모성성과 자연을 통해 치유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Q: 권영옥 시인의 견고한 고독은 어떻게 은유가 되어 시로 탄생하는지 설명해 주세요.

A: 고독은 인간 마음에 나타나는 견해나 생각 덩어리인 관념이지요. 어떤 인간이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존재합니다. 물론 나무, 동물, 꽃 이런 사물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고,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함께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나의 참여이고, 서로 교환하는 관계이지요. 본질적으로 유한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자는 세상 모든 관계에서 나 이외의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 톰 행크스처럼 고독은 인간과의 격리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나눌 사람들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고독은 나 혼자만의 존재, 존재자가 존재하는 것 때문에 자신에게 고립되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의 고독’이라고 하지요. 나 역시 존재의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관념화된 고독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나는 대상과 관념의 공통성과 동일성을 찾거나 유사한 것을 찾아봅니다. 이를테면 주변의 사물, 동물, 꽃, 사람들 말이지요. 유한적 존재자인 내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고독이 느껴지면 어딘가에 칩거하고 싶어집니다. 칩거는 존재가 점점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시쓰기 과정에서 이 고독이란 관념을 먼저 물질로 형상화합니다. “고독을 손으로 휘젓는다든가/ 커튼 안에서 잔을 오래 들고 있는 실루엣”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념의 동일성으로 내 주변에서 대상을 찾아봅니다. 점점이 사라지는 나선형의 소라껍데기나 수도원 회랑의 복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은유의 확장은 소라껍데기의 속성과 소실점을 향하는 회랑의 복도에서 공통성이나 동일성을 찾습니다. 그리고 정황을 만들고, 이를 재발견하고 재구성해서 대상들과 연관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마지막으로 화자의 개별적 정서를 창출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마음은 고독을 버무리며 산다
   
      사방에서 고독이 흘러들면
      쓸쓸함을 더 주입하고, 두께를 재고 용해해서
      한 모양을 만들어 간다.

      고독의 깃이 하늘로 솟구치면
      공작은 뱀잡이수리가 되고
      입을 쭉 당기면 흰 유홍초는 나팔수가 되고
      고독을 휘저으면 빈 달팽이집이 된다.
       (생략)
                                  -「고독의 모양」 부분
 
 위의 시처럼 고독은 보이지 않고, 막연하고, 들리지 않은 관념입니다. 이를 끈적한 물질이나 소라껍데기로 사물화해서 은유 과정을 거치면 고독은 마치 보이고, 감각적인 형상물이 됩니다.

 

 

       고통의 지층학 권영옥 시집 『모르는 영역』 읽기
                      - 오민석(문학평론가 · 단국대 교수)

 

I.해설

소크라테스와 (그의 손자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떤 선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함’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악이 ‘윤리’의 이름을 행해졌던가. 궁극적 선을 지향하는 예술이 때로 윤리와 싸우는 것은, 모든 윤리와 도덕이 항상 선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함’이란 전유專有와 규정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때 온전해진다. 선의 개념을 정의하는 순간,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다른 모든 것은 선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혹은 예술적 선이란, 규정이 아니라 ‘응시’에서 생긴다. 전유를 통한 강요가 아니라, 자신과 타자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상처 줌이 아니라 ‘상처받기 쉬움vulnerability’의 상태에 있을 때, 예술은 상처를 범주화하지 않으며 상처와 더불어 운다. 이글턴T. Eagleton이 레비나스E. Levinas의 윤리학을 “당당한 성취의 윤리가 아니라 무너짐 그리고 상처받음의 윤리”라 정의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시는 아픔과 결핍을 응시하며, 그것과 함께 눈물 흘리고, 그것을 기록한다. 이런 점에서 권영옥의 이 시집은 고통의 다양한 지층에 대한 탐구이다. 고통은 오랜 역사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권영옥은 그것을 뚫고 들어가 은유와 환유를 동원하여 고통의 지층학을 쓴다.

냉동의 시간을 견뎠던 나는 줄기에도 층계가 생겼다 바람의 무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새벽 굴착기에 들이 받쳐 퇴적층이 쿵 떨어진다 그 속에 들어있던 삼엽충이 나동그라지고 빙하기의 끝줄을 잡은 혈관에서도 벌레가 실눈을 뜬다
굴착기 소리는 점점 커진다 내 몸에 모르는 검은 무늬들이 소용돌이친다 예전의 나와 지금 나도 내가 아니다 옆구리에 들러붙은 어린 순이 목을 빼고 사방을 살핀다 아메바, 사우르스고가 떨어진다 벌레들은 서로의 연대기를 모르는 채 부둥켜안고 운다 다른 시간을 모르는 굴착기만 신나서 레고 부수기 놀이를 하고 있다 시멘트 바닥에서 사이버 포뮬러 신이 싹 틔울 준비를 한다 순교의 가시관은 내일이다
                                ― 「고생대 고사리」

 

어떠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들 잘하지 못하는데), 권영옥은 어떤 진술을 할 때도 ‘시’의 형식으로 한다. 가령 랑시에르J. Rancière에게 있어서 “문학의 정치”란,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문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정치적 실천일 수는 있으나 적어도 ‘문학의 정치’는 아니다. 문학은 정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 오로지 문학의 형식으로 한다. 권영옥 시인은 고통의 지층을 탐구할 때도 기술記述 description이나 설명이 아니라, 은유와 환유로 한다. “고생대 고사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비극과 운명의 “굴착기”는 인류의 먼 과거로부터 “어린 순”과 “벌레”의 삶을 무참히 훼손해왔다. 생명체들은 “자신도 모르는 검은 무늬들”(죽음)의 공포 속에 언제든지, 갑자기 노출될 수 있다. “서로의 연대기도 모른 채, 부둥켜안고” 우는 것이, 슬픔의 몸(신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이런 “순교의 가시관”이 모든 피조물인 생명체들의 미래(“내일”)이다.

 

   고원에 이르자 수박이 커가는 것 같이 새가
   지구본을 바라본다
   둥근 것의 환영이 빛을 뿌려 얻은
   또 하나의 행성에서 새가
   깊이에 무리수를 두며
   부리로 수박을 찍은 후 땅 깊숙이 들어간다
   붉은 강과 불의 혀를 만나고
   빛을 덮은 돌과 검은 유전 사이에서
   굶주린 거인을 만나는 순간
   붉은 혀와 검은 그림자가 범람하는 땅속에서
   시조새는 둥근 돌 하나를 물고 나온다
   지구 속의 또 둥근 돌, 돌 속의 데인 화상
   지구에는 상처 난 수박들이 너무 많다
   지구본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았다 
                            ― 「지구본」 전문

 

새가 “부리로 수박을 찍은 후 땅 깊숙이 들어”가는 행위야말로 고고학 혹은 지층학의 기술技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깊은 지층 속에서 새가 발견하는 것은 “돌과 검은 유전 사이”의 “굶주린 거인”이다. 지층의 먼 땅속에 숨어 있는 죽음의 폭력은, 바로 지금, 여기의 수술실에서 “금속성”으로 “돌진”해온다. 땅속에서 “범람하는” “붉은 혀와 검은 그림자”는 시간의 지층을 뚫고 먼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 움직인다. 이 끝없는 죽음의 동선動線이, 지구에 “상처 난 수박”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구본을” 오래 들여다본 시적 화자의 결론이다.

 

II.
앞에서 인용한 시들이 고통의 지층학 총론總論이라면, (권영옥 시인에게는) 고통의 각론各論도 있다. 그리고 고통의 각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보편적 고통의 가장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몸’이다. 수많은 시에 어머니가 등장하고, 어머니의 죽음이 나오며, 그 위에 뜬 충만한 “보름달”이 나오고, 어머니의 영혼처럼 “나비”가 날아다닌다.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어떤 향기가 누르는 달꽃
        …(중략)…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봄엔 집과 뜰에 이 꽃을 심어야지 생각하죠
   달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당신
      …(중략)…
   수술실 몇 개의 둥근 등은 생각 없이 빛나고
   무심한 칼은 방광을 바라보고 있다
   날개가 흔들린다
   죽는 건가?
   돌진해오는 금속성 하나 어쩌지 못해
   아찔하게
   소실점으로 흩어지는 영혼 한 점
   붉은 혀와 검은 그림자가 범람하는 땅속에서
   시조새는 둥근 돌 하나를 물고 나온다
   지구 속의 또 둥근 돌, 돌 속의 데인 화상
   지구에는 상처 난 수박들이 너무 많다
   지구본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았다
                            ― 「지구본」 전문

 

새가 “부리로 수박을 찍은 후 땅 깊숙이 들어”가는 행위야말로 고고학 혹은 지층학의 기술技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깊은 지층 속에서 새가 발견하는 것은 “돌과 검은 유전 사이”의 “굶주린 거인”이다. 지층의 먼 땅속에 숨어 있는 죽음의 폭력은, 바로 지금, 여기의 수술실에서 “금속성”으로 “돌진”해온다. 땅속에서 “범람하는” “붉은 혀와 검은 그림자”는 시간의 지층을 뚫고 먼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 움직인다. 이 끝없는 죽음의 동선動線이, 지구에 “상처 난 수박”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구본을” 오래 들여다본 시적 화자의 결론이다.

 

II.
앞에서 인용한 시들이 고통의 지층학 총론總論이라면, (권영옥 시인에게는) 고통의 각론各論도 있다. 그리고 고통의 각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보편적 고통의 가장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몸’이다. 수많은 시에 어머니가 등장하고, 어머니의 죽음이 나오며, 그 위에 뜬 충만한 “보름달”이 나오고, 어머니의 영혼처럼 “나비”가 날아다닌다.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어떤 향기가 누르는 달꽃
      …(중략)…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봄엔 집과 뜰에 이 꽃을 심어야지 생각하죠
   달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당신
      …(중략)…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어요
   바글바글
   우리 수신호 해요 나는 기억의 향기로 날았다가
   식은 향기로 말하다가 웃다가 찡그리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엄마 안녕!
   같이 있고자 기적을 일으키려니 달이 보고 웃네요
                           ― 「모르는 영역」 부분

 

권영옥에게 어머니는 슬픔과 고통, 그리움의 기표이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곳마다 거의 예외 없이 “달”이 뜬다. 달은 완성된 자궁과 풍요와 영혼의 젖줄 같은 것이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에서 “모르는 영역”은 (현재는) 비존재로 존재하는 어머니의 영역이라 보아도 좋다. 그곳은 어디인지 모르지만 “달맞이꽃 향기”가 나고, 달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는 곳이다. 달은 죽음의 중력과는 반대 방향으로 화자를 둥둥 띄운다. 마치 “무중력” 속에서처럼 화자는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 경계 너머의 “모르는 영역”에 있는 어머니에게 화자는 “엄마 안녕!”이라고 말을 건다.

 

   숲을 지나갈 때 운구차에 실린 어매는 말을 쏟아냈니더
   입말은 가슴에서 일어나 밖으로 쏟아져도
   밖의 소리는 외계가 아니었니더
   감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오랜 세월 참았던 속을 한꺼번에 탁 터트리는데
   어매 참
   감나무 밑에는 말 껍데기가 수북했니더
   그늘이 들마루를 덮을 즈음
   어매는 청보리 들판을 눈에 넣고 있었니더
   보리싹이 치근에 달라붙어
   정신 어딘가에 쌓였던 이바구를
   생마늘 엮듯 말을 엮어나갔니더
   어매 이제 말 좀 그만하그라, 야야 니 인생 뭐 있는 줄 아나
   내가 겉보리로 살아왔다 아이가, 구순 어매의 입에는
   바람이 다 빠져버렸니더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찾겠다며
   가슴 속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뒤지는 울 어매
   그 속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를 건져 올리는데
   말이 첫 울음을 시작하는 순간
   어매는 운구차에 실려 먼 북쪽으로 달리고 그 좋아하던
   핸드폰도 어매 손만 찾았니더
   하도 우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봤더니
   그곳에 메꽃이 낑겨 있었고
   몸이 틀어져도 울 어매 보고 싶다는 말만 자꾸 했니더
                             ― 「말을 복제하다」 전문

 

일반적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어머니는 끝도 없이 말을 쏟아낸다. 실제로는 어머니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의 화자가 죽은 어머니의 하고 싶은 말을 끊임없이 대신 “복제”하는 것이다. 화자에게 어머니는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까지 찾기 위해 “가슴 속으로 들어가 깊은 곳을 뒤”져야 하는 존재이다. 어머니의 사라짐과 동시에 어머니의 모든 언어도 사라진다. 화자는 어머니의 말을 계속 대신 함(“복제”)으로써 어머니와의 이별을 부정하거나 지연시킨다. 화자는 마치 상여 소리의 후렴처럼 “~니더, ~니더”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채전은 나비에게 경계 너머에만 있습니다
   나비가 울타리를 넘어와 파밭을 돌더니
   어제처럼 손을 비빕니다
      …(중략)…
   파꽃이 비에 엎어질까
   파 씨가 뿌리내리지 못할까
   엄마인지 단박에 알아버렸습니다
   어머니의 파뿌리를 딛고 선 나도 파꽃 여자입니다
                                  ― 「흰 수건」 부분

 

시인은 어머니를 계속 소환한다. “경계 너머”의 어머니가 “나비”의 모습으로 경계를 넘어온다. 비존재가 존재로 현현할 때 ‘형태 변용metamorphosis’이 일어난다. 언어의 형태 변용은 은유이다. 화자가 나비를 “엄마인지 단박에 알아버”릴 때, 메타포는 탈코드화decoding된다.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나비가 된다. 이것이 경계 너머의 존재를 현세로 불러오는 시인의 방식이다.

 

   먹구름이 내려앉은 수돗가
   엄마가 몸을 일으키는 일은 거품 부는 것뿐이죠
      …(중략)…
   엄마, 어느 하늘역을 지나고 있나요
   수국 피는 계절이면
   대야에 거품 풀어놓고 가만가만 머리를 흔들어요
                          ― 「푸른 비눗방울」 부분

 

화자는 “푸른 비눗방울”로 거품을 풀어놓는다. 거품은 중력을 버리고(혹은 거부하고) “하늘역”으로 상승하는 것의 시니피앙이다. 피조물은 몸의 은유를 거치지 않고 천상天上으로 오를 수 없다. 몸이 몸을 버리고 비눗방울로 형태 변용할 때 은유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이 아닌 곳에 있는 비존재를 만나는 길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천상의 존재가 은유를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 아니면 지상의 존재가 은유를 정거장을 거쳐 “하늘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권영옥 시인은 이렇게 메타포의 왕복운동을 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III.
권영옥 시인이 그려내는 고통의 지층학 총론이 인류의 역사라면, 각론의 주인공들은 어머니의 죽음과 이 세상에 만연한 사회적 죽음들이다.

 

   연기가 도시를 층층이 에워싼다
   계단식 집들이 형체를 잃고 연기와 먼지가 모여
   기밀 역사를 만든다
   반군의 은신처 알레포에
   주둔한 알 아사드 왕관은 이곳의 하늘이다
   천둥과 번개의 빛발로 서 있는 왕은
   아기의 울음을 먹고 팔과 다리를 부러뜨린 후
   뼈까지 씹어대는 가난한 드라큘라,
   핏물 빠진 목에도
   이빨을 사정없이 꽂는 밤의 수리부엉이다
                          ― 「그믐달의 잔영」 부분

 

시리아 내전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죽음의 “기밀 역사”에 시선을 던진다. “가난한 드라큘라”의 먹이는 살아있는 생명들이다 그것은 “핏물 빠진 목”에도 사정없이 이빨을 꽂는다. 생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이런 공간을 시 인은 “그믐달의 잔영”이라 부른다. 보름달이 생명으로 충 만한 자궁의 메타포라면, “그믐달”은 생명력을 모두 잃은, 죽은 에너지의 은유이다. 권영옥 시인은 이 작품 외에도 매향리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매화도 르포」, 「화산 봉우리 를 넘어서―모코하람의 아기 생산 공장」 같은 작품들을 통 해 고통의 다양한 지층을 응시한다. 권영옥 시인이 바라보 는 고통의 땅속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레퀴엠」, 「겨울 음 화」, 「암스트롱」 같은 작품들은 죽음의 파편들로 분분紛紛하다.

 

   이승의 살이 빠져나간 목도리처럼
   엄마는 밤새
   그 밤새
   구급차 속에서 요단강의 물 주름을 움켜쥐었다고 하고
   섣달 긴 밤에는
   장롱만 뒤적이다 새벽 찬바람을 맞이했다는 후문이
   가슴 유리창에 낀 성에꽃 같다
                           ― 「꽃이 찌른다」 부분

 

이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이 작품에서도 시인 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소환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꽃조 차 차가운 성에가 되어 마음을 찌르는 고통 속에서 권영옥 의 시들이 발아한다. 그러나 권영옥 시인의 진정한 잠재성 은 이런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은유화하고 환유화하 는 그의 능력에 있다. 시집의 후반부에 실린 「사과를 들고 서」나 「금빛 설화」 같은 작품들은 예술가가 현실과 어떻게 거리를 갖고, 그것을 세계의 보편적 서사 혹은 신화로 전 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현실과의 거리를 설정하 고 현실의 특수성을 견뎌내며 그것을 보편적 서사로 치환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훌륭한 예술이 가지고 있는 ‘숭고미sublimity’이다.
 
   무트의 날개가 물 표면을 팍 치며 지나갑니다
   수양버들 숲에서는 은하수를 타고 내려온 왕관매미 무트의 소문이 자자합니다 수십

   회 회전한 무용수 얼굴, 날개에 왕관 무늬가 찍혔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작은 소란을 틈타 낮 동안 긁어모았던 물꽃 화판으로 유도등을 켠 채 숲을 가만히

   빠져나왔습니다 요즘 은빛 감정이 수시로 찾아와 불빛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엄마가

   늘 빛을 비추며 맞이하던 바위로 갑니다 뻐근한 불행을 내려놓기도 전 눈을 감거나

   그리기만 해도 가슴이 환해집니다
      …(중략)…
   부재에 비틀대던 나는 활옷을 늘어뜨린 물의 신 무트와 극적으로 마주쳤습니다
      …(중략)…
   동트기 전 엄마는 발 없이 날아와 덜 깬 나를 재촉합니다 저기, 다리 위에 왕관매미가

   서 있습니다. 저는 사과를 들고 갑니다
                        ― 「사과를 들고서」 부분

 

이 작품은 죽음과 생 사이의 복잡한 길항拮抗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채색함으로써 (권영옥의 시들을) ‘세부의 감옥prison of details’에서 구해낸다. 시는 그 모든 디테일을 다 그릴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시는 디테일의 우물에서 시작되지만, 그곳에 갇혀있지 않고 ‘보편의 서사’라는 둥지 안에 세부 사항들을 품는다. 그때 보편의 서사는 무수한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 Blake의 ‘신화 시’들에서 이런 시도를 만난다. 이 작품에서 물의 신 “무트”와 “왕관매미”는 (죽음과 반대되는) 생명의 거대한 상징으로 읽어도 된다. 그것은 죽음과 싸우며 생명의 “활옷”을 입고 (어머니의) “부재에 비틀대던” 화자를 구한다. 그런데 엄마의 재촉을 따라 다리 위의 왕관매미에게 갈 때도, 화자는 왜 “사과”를 들고 갈까. 영원한 구원의 다리를 건널 때에도 인간은 “사과”를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욕망과 금기의 상징이며, 삶-죽음 사이의 길항에서 인간을 갈등하게 한다. 권영옥 시인은 이렇게 신화적 서사 속에서도 손쉬운 해답 찾기로 넘어가지 않는다. 신화는 세계의 거대한 지도이지만, 모든 지도가 수월한 길을 주지는 않는다. 삶의 대로에 항상 놓여있는 장애물을 잊지 않고 건드릴 때 시인의 웅숭깊은 사유가 드러난다.

 

   화첩에서 크림트의 활옷을 보는 순간 정원의 생명나무며
   불가사리 이런 것들이 따라오는 밤이다
      …(중략)…
   시간이 닫히는 반복 속에 나의 활옷이 관짝에
   찍히고 말았다
   활옷 조각이 나비로 변하는 설화다
   그녀가 생명나무 잎사귀에 알을 소복하게 낳고 있다
   깨어나고 성장하고 번데기일 쯤
   우리의 기도는 은빛 가루를 얻는 거다
   성배聖杯가 하늘을 떠다니면서
   땅 위에 젊은이들을 향해 빛을 뿌린다
      …(중략)…
   지상에서 허공으로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나비는
   낮 속에 밤을 질러 더 높은 하늘로 날아간다
   최초의 밤
   바람 따뜻한 구름 속에서 별이 반짝이고
   밝은 빛 가루가 밤 속에 세워지고
   활옷에 수놓아진 생명나무의 열매가 황금 각으로
   반사되어 항해를 시작한다 이곳도 금성
                          ― 「금빛 설화」 부분

 

이 작품도 생명과 죽음의 서사narrative를 그림처럼 화려한 “금빛 설화”로 그려내고 있다. “생명나무”와 “활옷”, 그리고 기화된 영혼인 “나비”가 함께 우려내는 풍경은, 슬프고, 장엄하며, 아름답다. 이 시집은 이렇게 고통(죽음)의 지층학을 총론에서 각론으로 또 신화적 서사로 왕복 운동 하며 그려낸다. 그리고 모든 행로에 은유가 빠지지 않는 다. 그러므로 권영옥은 은유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시인이다.

 

 

 

 

  

 

    ▲권영옥 문학평론가

 

 [권영옥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 경북 안동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시론서 『한국현대시와 타자윤리 탐구』, 『구상 시의 타자윤리 연구』. 
□ 시집 『청빛 환상』, 『계란에 그린 삽화』 , 『모르는 영역』
□ 전) 상지대, 아주대 외래교수, 현재) 《두레문학》편집인, 문예비평지 『창』편집위원 
□ <두레문학상>수상.

□ 이메일 : dlagkwnd@hanmail.net

 

 

 

 【편집=이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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