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25) -부엉이
한 상 훈 (문학평론가)
부엉이는 넓고 평평한 얼굴에 머리 꼭대기에 귀 모양의 깃이 있으며, 큰 눈을 가진 야행성 맹금류이다. 그 종류에 따라 예외가 있는데, ‘쇠부엉이’처럼 낮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새도 있으며, ‘솥부엉이’처럼 귀깃이 없는 부엉이도 있다. 이 새는 암수가 역할 분담이 철저하다. 수컷이 새끼들의 먹잇감을 가져오고, 암컷은 먹이를 잘게 잘라 새끼들을 먹이며 키우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기에, 엄마부엉이가 없으면 새끼들은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다. 수컷은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아무리 울어대도 그 이유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고 한다.
누이들의 발길을 따돌려 나는 성황당 지나 밤길의 긴 방죽을 오랜 세월 걸어가니 새는 내 머리맡을 돌다 깊은 산으로 사라졌다 움막으로 노파가 들어가듯 검은 밤나무 가지에 부엉이가 밤톨처럼 내려앉듯 누군가 나를 부엉이 눈 속으로 데려가리라 믿었으나 귀살쩍은 나에게 추파를 던질 뿐 어린 왜가리만 움쭉달싹 못해 밤 이슥하도록 공중에 걸려 있었다 -문태준, <새> 부분
음침하고 어두운 산골의 밤길 속에서 무언가 뛰쳐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부엉이가 한밤중에 그 동네를 향해서 울면 사람이 죽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 시에 등장하는 부엉이도 예사롭지 않다. 울음보다 섬뜩한 그 눈빛. 한밤중에 부엉이 눈의 색깔은 주황빛이거나 노랑 색깔을 띤다. 부엉이의 커다란 눈 속으로 시인은 빠져들어 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린 왜가리만 그 새의 섬뜩한 서슬에 몸이 얼어붙어 오랫동안 꼼짝 못하고 있다. 이 시는 아득하고 무서운 옛날의 시골길이 연상되며, 다소 난해하고 환상적인 울림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엔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시를 감상해 보자.
부엉이가 안경가게를 찾아왔습니다 -아저씨, 낮에도 보이는 안경 하나 맞춰 주세요 부수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글쎄, 그런 안경이 있을지 모른다 어디, 이걸 한번 써 봐, 안경집 아저씨가 새카만 선글라스를 부엉이에게 주었습니다 -어라, 참 잘 보이네요. 아저씨 고마와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부엉이는 뒷짐을 진 채 배를 쑥 내밀며 어슬렁어슬렁 돌아갔습니다 -박목월, <부엉이> 전문
맑고 깨끗하다. 박목월 시에 나오는 ‘부엉이’는 문태준의 시와는 대조적으로 착하고 순진한 학생의 이미지다. 낮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경 가게를 찾아간다는 부엉이에 대한 시인의 시적 발상이 절묘하지 않은가. 안경주인 아저씨가 어두운 렌즈의 선글라스를 골라주니 이젠 잘 보인다고 하면서 어린 부엉이가 만족스러워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그 장면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시인은 큰 눈을 번뜩거리며 밤에 활동하는 부엉이의 생태를 활용하였다. 시적 공간에 동화 같은 이야기를 대화체로 현장감 있게 펼쳐 나가고 있어,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읽고난 후 짙은 여운이 남는다.
다음은 간도지방에서 내려오는 부엉이와 쥐에 대한 이야기다.
해란강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비옥한 평강벌 윗목에는 논밭 한가운데 꼭 마치 쥐처럼 웅크리고 앉은 산봉우리가 있고 그 맞은켠 서북쪽으로 약 4~5리 가량 떨어진 산마루에는 독기 있는 눈길, 뾰족한 발톱, 예리한 주둥이를 가진 부엉이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쥐봉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 두 산을 부엉이산과 쥐봉이라고 부른다.
멀고 먼 옛날 부엉이의 고향은 워낙 저 멀리 떨어진 남쪽나라였다. 그해따라 남쪽나라에는 심한 재해가 덮쳐들어 날짐승, 길짐승들이 살아가기가 말이 아니었다. “애들아, 이러구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꼼짝 못하고 굶어죽겠구나. 제비동생이 하는 말이 북쪽나라에는 먹을 것도 흔하구 살기가 좋다더구나. 내 어디 한번 가보고 오련다.” 새끼부엉이들에게 이런 말은 남긴 어미 부엉이는 하늘가에 높이 올라 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깃을 쳤다 (······) 그렇지 않아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산쥐는 부엉이가 침식을 잊고 식량 모으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흡족해하며 저절로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는 것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 “산쥐 동생, 내 고향에 돌아가 식솔들을 데려오려는데 그동안 좀 창고를 보아주게나. 그러면 돌아와 그 신세를 톡톡히 갚아드리려네.” 부엉이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산쥐가 긴 꼬리를 내흔들며 맞받아 넘겼다. “아무렴, 이후부터 이웃이 되겠는데 그만한 일쯤이야 마땅히 해야 하지요. 신세거니 생각 말고 아예 마음을 푹 놓으시고 어서 잘 다녀오시우!” (······) “얘들아, 오늘부터 우리는 쥐새끼를 잡아먹기로 하자. 쥐들이 우리 식량을 몽땅 도적질해 먹었으니 이 쥐종자를 남겨두고서야 어찌 맘 편히 살아간단말이냐? 우리를 굶어죽게 하는 쥐새끼들을 이 땅에 종자도 남김없이 잡아치워야겠다!” (······) 이제 산쥐가 조금이라도 움쩍거리기만 한다면 부엉이는 그 즉시 흉맹스레 날아가 산쥐의 각을 뜯어버릴 판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산쥐는 꼼짝 움직일 엄두를 못냈다. 그러다가 세월의 비바람 속에서 산쥐는 그만 봉우리로 굳어져버렸다. 그리고 그와 마주앉은 부엉이도 산쥐를 지켜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만일 쥐봉이 움직이기만 하면 부엉이산은 곧 날아가 덮칠 것이라고들 한다. - <부엉이산과 쥐봉>에서 (향토전설집)
이 글을 살펴보면 ‘부엉이’는 엄마의 모성이 강한 새로 나온다. 엄마 부엉이가 새끼들을 남쪽에 두고 북쪽에 홀로 가서 부지런히 식량을 모아서, 식량이 저장된 창고의 열쇠를 산쥐에게 맡기고 새끼들을 데리러 집으러 간다. 그 사이에 교활한 산쥐는 자기네 식구들과 함께 그 식량을 다 먹어치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엉이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쥐잡기에 나서고, 결국 부엉이 식량을 다 먹어치운 어미산쥐도 발각된다. 어미산쥐는 겁을 먹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가, 부엉이와 함께 그 형체 그대로 산봉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에서 ‘부엉이’는 모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식량을 창고에 저장해 두는 모습을 통해 부지런하고 성실한 캐릭터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인물들에게는 반드시 복수를 하는 무서운 존재의 양면성이 부각 되고 있다.
나는 산으로 오르는 자갈길을 골랐다. 3, 4천 년이 지나서야 땅 위로 솟아올라, 사랑스러운 크레타의 태양 아래서 다시 한번 몸을 덥히는 조그만 미노아 문명의 옛 도시를 찾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 서너 시간 걷는 피로가 봄이 불러일으킨 내 불안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잿빛 바위. 그 이지적인 무방비 상태. 험하고 황량한 산, 부엉이, 돌 위에 앉아있는, 밝은 빛에 멀어 버린 둥글고 노란 눈···, 엄숙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지만 부엉이이 청각은 예민했다. 부엉이는 날아 올라 조용히 바위 사이를 날다 이윽고 사라졌다. 대기에서는 백리향 냄새가 났다. 노랗게 핀 가시금작화의 첫물꽃이 가시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전체적으로 작가 특유의 서정적 표현 속에 주인공의 자의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선 바위산에 앉아있는 ‘부엉이’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부엉이는 산림이나 계곡, 바위산에서 어두워지면 활동을 시작하여, 새벽 해 뜰 무렵까지 활동하는 야행성 새다. “밝은 빛에 멀어 버린 둥글고 노란 눈”이란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이 낮이기에 맹금류의 섬찟함보다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새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카잔차키스(1883~1957)는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인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당시 그 섬이 터어키의 지배 속에 있어 그냥 크레타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오피니언/ 문학/ 예술/인터뷰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