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객기

조재은 수필가, 수필읽기 (6)

이지우 기자 | 기사입력 2020/06/13 [21:41]

한여름의 객기

조재은 수필가, 수필읽기 (6)

이지우 기자 | 입력 : 2020/06/13 [21:41]

                                                      한여름의 객기

 

                                                                                              조재은 수필가 

 

여름밤은 짧지만, 긴 이야기를 품고 있다.
경직됐던 시간들은 뜨거운 햇살에 녹아서 방랑의 바람을 기다린다.

 

학창 시절, 엄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여행을 가려면 가상의 시나리오 한 편이 필요했다. 돌아가신 친구의 외할아버지는 속초에서 오징어잡이 배의 선주로 둔갑하고, 또 다른 친구 삼촌은 태어나지도 않았으나 대구에서 사과 농장을 운영한다. 가끔은 가는 곳의 전화번호도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그 고장의 지역 번호쯤은 알아두어야 한다.

 

남의 집에 함부로 전화하시는 부모는 아니므로 제 날짜에 돌아오면 거짓말이 탄로 날 염려는 없다. 무사히 도착 했다는 전화와 중간에 잘 있다는 보고만 잊지 않으면 통과된다. 그 당시 제주도에 배를 타고 간다면 절대로 허락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일정은 부산에 사는 친구 이모 집에 가는 것으로 제출용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네 명은 공부 할 때보다 어떤 일을 꾸밀 때  마음이 더 잘 맞았다.
그 동안, 여름 방학에 설악산을 갔으므로, 제주도로 가자는 의견은 쉽게 정해졌다. 대학 3학년인 우리는 중학생처럼 들떠서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이란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바닷가에서 들어야 할 포터블 야외 전축, 책, 오이지와 밑반찬 같은 준비물이었다. 한라산 등반과 서귀포 바다를 거닐 수 있으니까 보통 여행보다 두 배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며 마음이 들떠 의논 하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로 떠나는 배를 타고 부터였다. 무전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여학생 신분으로는 힘들 것 같아 무전여행 비슷한 느낌이 들도록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통통배의 삼등칸을 타고 도착할 즈음에는 노란 물까지 서너 번을 토했다. 앞이 노랗게 보이다 까맣게 보일 때쯤 걸음을 휘청거리며 제주도에 내렸다.


도착해서 하루를 꼬박 멀미 후유증으로 소비했으니 시간을 아끼자고 다음 날은 새벽에 한라산을 향해 떠났다. 한라산이 기상 변화가 심하다는 말은 이십 대의 혈기로 흘려들었다. 전문 등산인 정도가 아침에 떠나 저녁에 내려 올 수 있다는 백록담을 향해 샌들을 신고 소매 없는 블라우스 차림으로 떠났다. 물통 하나 들지 않고. 점심은 대피소에서 간단히 먹기로 하고. 산을 오르는 도중 만나는 사람들은 등산화에 등산복 차림들이다. 그 사람들이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힐긋 힐긋 쳐다본다.


올라가는 도중에 소나기를 두어 번 맞았지만, 햇빛이 나니 얇은 옷은 체온으로 말랐다. 험한 개미등에서는 물이 없어 빗물이 흐르는 것을 나뭇잎에 받아먹곤 했다. 설악산에서 냇물을 떠 마시던 생각만 하고 맨 손으로 산에 오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가장 용감하다는 말을 우리는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개미등까지는 잘 올라갔는데 그 곳에서 이정표를 누군가가 장난으로 돌려놓았다. 잘못된 이정표를 따라 산 속을 헤매는 도중 날은 어두워지고. 전 날의 뱃멀미로 끼니를 거르고, 다음 날도 새벽부터 서둘러 아침도 굶고 산을 오르느라 허기가 졌다. 땀도 흘려 갈증은 나는데 어디를 봐도 물을 찾을 수가 없다. 체력이 서서히 바닥이 났다.


해가 지자 기온이 떨어져 얇은 블라우스 차림의 우리들은 추위에 떨기 시작했다. 어금니 부딪치는 소리가 서로에게 들릴 정도였다. 칠흑 같다는 산의 어두움을 실감하며 나무 밑에 서로 꼭 붙어 체온을 유지했다. 배고픔, 추위, 무서움은 무지를 탓하며 참을 수가 있었는데 갈증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뭇잎에 고인 빗물이라도 찾으려고 더듬거리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물이 있다고 한다. 웅덩이 같은 곳이려니 하고 어둠속에서 두 손으로 물을 조금 떠서 먹었는데 흙 비슷한 것이 입 속으로 넘어간다. 낮에 빗물 흐르는 것을 떠서 먹을 때도 흙을 조금 먹었기 때문에 물에 흙이 섞였다고 생각했다.


신문에서나 보았던 온갖 조난 사고를 떠올리며 어둠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캄캄해지니 시간의 흐름도 감지하기 어려웠고, 식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떠나왔으니 우리를 찾기 힘들 거라는 반성의 소리도 나왔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불빛이 우리에게 비추어지고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온 몸이 긴장이 되어 서로 잡고 있던 손에 아프도록 힘을 주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네! 여기요, 여기!” 서울에서 온 고등학교 등산반 학생들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길을 잃었지만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니, 이런 차림으로 올라 오셨어요.” 부끄러운 생각보다 반가웠고 인사도 하기 전에 “저~ 혹시 먹을 것 있어요”하고 물었다. 고등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끓이지도 않은 라면을 빼앗듯이 나누어 먹었다. 평생 제일 맛있는 라면이었다.


동이 트고 우리가 있던 곳을 나서며 어젯밤 갈증에서 살려 주었던 물웅덩이를 보았다. 어느 등산객이 쓰레기를 묻었다가, 위의 것은 비에 쓸려가고 밑에 남은 쓰레기봉지에 빗물이 고인 것이었다. 온갖 날벌레와 이름 모를 벌레들이 우글우글 하였다. 흙인 줄 알고 삼킨 것들은 날벌레들이 죽은 것이었다. 


으악! 저 물을 먹었다니…. 
해골에 고인 섞은 물을 바가지에 담겨있는 물인 줄 알고 먹은 후, 깨달음을 얻은 원효와 해후하며 산을 내려 왔다. 한라산은 나의 젊은 날의 객기를 가르침으로 받아 주었다.


여름은, 일상에서 모험의 감행을 유혹하고, 허황된 꿈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꿈과 모험, 모든 것은 생의 가장 푸른 시간 안에서는 가능하다. 

 

 

 

 

  

   ▲ 조재은 수필가

 

 

 [약력]

 □ 이메일: cj7752@hanmail.net

 □ 전) 『현대수필』 주간, 편집장, 『월간문학』 편집위원, 한국펜클럽 이사
     현) 『현대수필』자문위원 『에세이포레』 편집위원
 □ 작품집 <시선과 울림>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하늘이 넒은 곳> <삶, 지금은 상영 중>  <에세이 모노드> 

 □ 구름카페문학상', '일신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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